Silla > 0676 ⏍ 新羅民族論 > (2) 多種族 상태 > 姓氏 > 0465.03 日本書紀(720)

기소궁숙니 등이 곧 신라에 들어가 이웃 군을 같이 공격하였다. 新羅王 夜聞官軍四面鼓聲 知盡得喙地 與數百騎亂走 신라왕은 밤에 관군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喙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기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소궁숙니는 쫓아가 진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喙地悉定 遣衆不下 喙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閼川 楊山村 → 梁部 → 中興部
蘿井은 楊山의 산기슭에 있었으므로 楊山은 남산이다. 閼川에 관한 기록은 형산강에 어울리므로 閼川 楊山村은 형산강을 건너는 나루 인근의 남산 기슭일 것이다. 이곳은 외부의 문물이 서라벌로 들어오는 관문이므로 신라의 시조가 이곳에서 났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한편, 蘿井은 楊山의 기슭에 있었지만 이 楊山은 月城에서 보았을 때 남쪽에 있기 때문에 훗날 南山이라 불린 듯하다.
34475#34478 SIBLINGS CHILDREN 34478
 
突山 高墟村 → 沙梁部 → 南山部
삼국사기에는 서라벌 주변의 明活山, 吐含山, 北兄山, 西兄山 등이 제사를 지낸 곳으로 나와 있다. 남산만 빠졌을 리는 없을 테니, 제사 기록에 있는 髙墟(沙梁)를 남산에 제사지낸 곳으로 추정한다. 고려사에도 沙梁을 南山部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남산은 남북으로 결이 나 있어 금오봉에 오르는 길 또한 이 결을 따라 났을 것이므로 그 입구인 포석정 일대를 突山 高墟村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蘿井과 가까워 혁거세 설화와도 어울린다.
34475#34479 SIBLINGS CHILDREN 34479
 
...
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茂山 大樹村 → 漸梁部·牟梁部 → 長福部
삼국유사(1281)에는 仙桃聖母가 西述聖母라고도 되어 있어 仙桃山은 삼국사기(1145)의 제사 기록에서 西述로도 표기된 牟梁에 있었던 듯하다. 牟梁은 원래 茂山 大樹村이었다고 하므로 茂山은 仙桃山이 된다. 이곳은 蘿井에서 멀지 않아 仙桃聖母가 혁거세왕을 낳고 仙桃山에 들어가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와 어울린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西兄山도 이 仙桃山으로 비정된다.
34475#34476 SIBLINGS CHILDREN 34476
 
0465.03 日本書紀(720)
34475#34344 SIBLINGS CHILDREN 34344
 
0465.03  日本書紀(720)
0465.03 日本書紀(720)
34475#34482 SIBLINGS CHILDREN 34482
 
0465.03  日本書紀(720)
0465.03 日本書紀(720)
34475#34483 SIBLINGS CHILDREN 34483
 
0465.03 ◾왜의 신라침공 경로
0465.03 ◾왜의 신라침공 경로
왜가 신라를 침공하는 경로는 영일만에서 형산강을 따라 올라가거나 울산에서 동천을 따라 올라가거나 황산강에서 양산 단층을 따라 올라가는 경로가 있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양산 단층을 따라 올라가면 梁部, 沙梁部 그리고 漸梁部(牟梁部)에 이르게 된다. 梁이 喙로도 표기되었다면 이들 지역은 喙部, 沙喙部 그리고 漸喙部(牟喙部)가 되므로 통틀어 喙地라 부를 만하다.
34475#34481 SIBLINGS CHILDREN 34481
 
1281 三國遺事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沙涿·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沙梁이라 쓰고 梁을 또한 道라고도 읽는다. ▐ 沙喙(524 봉평신라비) = 沙㖨(720 일본서기) = 沙涿(최치원) = 沙梁(1145 삼국사기)
34475#34480 SIBLINGS CHILDREN 344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