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 (08) 성씨

한국 성씨의 특징은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남 지역에서 출발한 신라가 한국을 통일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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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진서(648)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백제왕 여구를 진동장군 낙랑태수로 봉했다. ▶여구는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은 371년에 고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원왕을 전사시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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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송서(488)
高句驪王 高璉 晋安帝 義熙九年 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 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고구려왕 고연이 진나라 안제 의희 9년에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고연은 장수왕이다. 고려는 396년에 백제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400년에는 신라에 침입한 왜를 쫓아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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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김성회
▶한서와 후한서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 국왕과 인명기록을 보면 후마(주몽왕)·마와궁(태조왕)·수성(차대왕)·백고(신대왕)로 쓰고 있으며, 삼국지에도 마·궁수성·백고(고국천왕)·유리모(산상왕)·계(고국원왕)·안(광개토왕) 등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진서에 와서야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이라고 칭하고 사신들에 대해서도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성과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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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남제서(537)
가라(加羅)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에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이(夷)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4397
 
0521 양서(636)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 이름은 진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신라는 백제(372), 고려(413) 그리고 가라(479)에 비해 늦게 중국에 조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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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남사(659)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校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성은 모, 이름은 태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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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제번공직도(1914) 사라국
國王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其王姓募名泰 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성이 모이고 이름이 태인 왕이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為範 言語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고 나무에 금을 새겨 표시하였다.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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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울진봉평신라비
牟即智寐錦王 모즉지매금왕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양서에 나오는 募秦은 신라 사신이 牟即이라 한 것을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치면서 양나라 측에서 중국식 성과 이름으로 오해하고 발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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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이전 (<532) 삼국사기(1145)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 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까지도 신라왕이 김씨 성을 사용한 흔적이 없다. 따라서 왕건이 망명해 온 발해 왕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내려준 것처럼 신라왕이 남가라 왕에게 김씨 성을 내려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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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9 울주천전리각석
另卽知太王 영즉지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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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 삼국사기(1145) 신라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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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 일본서기(720)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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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일본서기(720)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등 모두 열 나라이다.
15627
 
0564 북제서(636)
고려, 말갈 그리고 신라가 사신을 통해 조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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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북제서(636)
詔以新羅國王金真興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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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백제의 여씨 왕성은 근초고왕이 고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듬해에 처음 나타나고, 고려의 고씨 왕성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신라와 가라에 침입한 왜를 내쫓은 이후인 장수왕때 처음 나타난다. 신라의 김씨 왕성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임나를 병합한 직후에 처음 나타났다. 패권을 장악했을 때 왕성이 나타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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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백제 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 高씨는 高句麗에서 따왔듯이, 가라 金씨는 金官國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왜 신라는 新羅로부터 新을 따오거나 鷄林에서 鷄를 따오지 않았을까? 혹시 김일제의 후손이라 金씨 성을 그대로 이은 것일까? 물론 신라 金씨도 金城에서 따왔을 가능성은 있다. 한편, 고려 高씨가 顓頊高陽의 후손을 자처한 것이 가식인 것처럼 신라 金씨와 가라 金씨가 少昊金天의 후손을 자처한 것도 가식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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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김성회
▶진흥왕 이전에는 신라 왕의 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김씨 성을 쓴 시조는 신라계에선 진흥왕이, 가야계에선 김유신(또는 조부인 김무력이나 아버지인 김서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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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수서(636)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高祖拜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김진평에 이른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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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북사(659)
傳世三十至眞平以隋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세인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나라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문제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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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8 진서
慕容雲 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和 高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為氏焉 모용운은 자가 자우인데 모용보의 양자다. 할아버지 화는 고구려에서 갈라져나왔는데, 고양씨의 먼 후손을 자처하여 씨를 고라 했다. ▶黃帝軒轅(황제헌원), 少昊金天(소호금천), 顓頊高陽(전욱고양), 帝嚳高辛(제곡고신) 등은 3황5제로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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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 삼국사기(1145)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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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01 일본서기(720)
장군 소정방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융(隆)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국변성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당에 바쳤다. 급히 인도하여 천자에게 나아가니, 천자는 은혜로운 칙명으로 보자마자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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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金城
백제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高씨는 高句麗에서 따왔듯이 신라金씨 또한 金城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1720#15629
 
0663-09-24 일본서기(720)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와 국민들이 호례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배를 띄워 비로소 일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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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24※
▶삼한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성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지방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은 주류성에 모여 왕조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663년에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한국에 백제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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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삼국사기(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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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 少昊金天
신라 왕족이나 남가라 왕족이 김씨 성을 사용한 것은 남가라가 신라에 복속한 이후다. 성도 金씨로 서로 같지만 뿌리도 두 왕족 모두 少昊金天의 후예를 자처하였다. 이는 진서(648)에 고려고씨가 顓頊高陽의 후예를 자처했다고 되어 있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모두 3황5제에 기대어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1720#15603
 
0676 한국통일과 신라 9주5소경
▶당나라는 668년에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그리고 676년까지도 신라의 북쪽 국경은 임진강이었는데 이것은 고려왕조가 망하기 전과 같았다. 한국에 고려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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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 한민족의 북방 이주
한국통일이 완성될 676년 당시만 해도 신라의 북쪽 경계는 임진강이었지만 이후 신라 말에 대동강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왕씨고려는 압록강까지, 그리고 이씨조선은 두만강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새로 취득한 영역에는 남부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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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1 金日磾
흉노 왕자 김일제는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가 무제의 신임을 얻어 투후에 봉해지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ᐥ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의 시기 즈음에 곤란한 처지가 되자 요동을 거쳐 서라벌로 도피했다. 서라벌에서의 그들의 등장은 훗날 알지 설화로 신성화되었다.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신라 왕조에 복무하다 미추에 이르러 마침내 신라의 왕이 되었고 나중에는 신라의 왕위를 세습하였다.ᐥ
1720#15580
 
0681 成漢王
신라 김씨 왕조는 자신들의 태조를 성한왕으로 인식했고 이는 신라 말까지 여러 금석문에 남아 있다. 훗날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미추왕이 신라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어 성한왕에 대응시킬 수 있다.
1720#15592
 
0925 고려사절요(1452)
세자 대광현 등이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성과 이름을 내려주면서 그를 왕실의 적에 붙이고,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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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신당서(新唐書)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신라왕의 성은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에게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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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赫居世
조선의 유민이 진한에 6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말이 낳은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성을 朴으로 하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어서 용이 우물가에서 여자아이를 낳자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는 중국 황실의 딸 신모가 진한에 와서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1720#15602
 
1145 閼智
신라 김씨 왕조는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하였고 조상이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는 알지 설화와는 모순된다. 알지 설화의 기록 시기가 늦기 때문에 신라 김씨 왕조가 망한 이후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김일제의 후손이 서라벌에 등장한 사건을 알지 설화로 신성화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두 갈래의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진다.
1720#15600
 
1145 首露
혁거세 설화, 알지 설화 그리고 탈해 설화 모두 득성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수로 설화에는 없다. 백제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高씨는 高句麗에서 따왔듯이 가라金씨는 金官國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1720#15601
 
1394 왕씨멸족
왕씨왕조와 이씨왕조는 존속기간이 비슷한데도 전주이씨는 우리 나라 성씨 중 세 번째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반면, 개성왕씨의 수는 많지 않다. 이것은 이씨왕조가 전조의 왕족이었던 왕씨를 멸족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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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창씨개명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하도록 하였는데, 창씨신고 가구수는 8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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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본관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경주 김씨, 경주 이씨 등이 있고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전주 이씨, 전주 김씨 등이 있다. 전주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인데 몽골침입 때 그 시조가 경주에서 전주로 이주하여 전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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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김해 김씨 412만, 밀양 박씨 303만, 전주 이씨 261만, 경주 김씨 174만, 경주 이씨 142만 ▶성씨가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해 김씨는 남가라 수로왕의 후손이고 밀양 박씨는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크게 번창하였고 경주 김씨는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경주 이씨는 신라의 건국에 참여한 양산촌장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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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분포
왼쪽으로부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 그리고 경주 이씨. ❶ 김해 김씨는 남가라 김수로왕의 후손인데 왜 서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가? ❸ 전주 이씨는 전주에서 기원하지만 이조의 건국 이후 한양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런데 왜 영남 지방에만 드물게 분포할까? ❺ 경주 이씨는 경주에서 기원하니 이러한 분포가 자연스럽다. ○ 서남 지역의 김해 김씨와 경기와 영남 이외의 전주 이씨는 자연스러운 분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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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2 김성회
대한민국의 성관(姓貫)은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으로 파악되고 있으며(2000년 인구센서스·통계청), 그중 김씨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992만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의 신라김씨 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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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김성회
김씨의 시조에 대해서는 네 가지 주장이 있다. ❶ 소호금천씨의 후예 - 김유신비문(673), 김인문비문(695),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삼국사기(1245) ❷ 김일제의 후예 - 문무왕비문(681),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❸ 알지와 수로의 후예 - 삼국사기(1145), 삼국유사(1281) ❹ 신라가 고대국가로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씨족을 표시하는 한자식 성으로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 ❶과 ❸은 비과학적이고 ❷는 근거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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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조는 초원에서 오지 않았다.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라와 신라는 고고학적 양상이 백제나 고려과는 다르고 초원과 닮은 점이 있다. 금동관, 적석목곽분 그리고 순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 두 나라를 초원에서 흘러온 세력이 세운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중국에서 대동강 유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초원에서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따라서 고고학적 양상은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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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0082 한서 元后傳   0082 한서 王莽傳   2003 이덕일   2003 조선일보: 日帝의 창씨개명 강요문서 발견   2010 조선일보: 몽골 김씨, 태국 태씨   2020-12-06 이덕일   2020-12-14 이덕일   2020-12-21 이덕일   2020-12-28 이덕일   2021 이덕일   문무왕 비문의 비밀   문무왕 비문의 비밀  
 
한국 성씨의 역사
원래 고대에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 중 중국식 한자성은 후대에 들어왔으나 선대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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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씨의 의미
성씨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생물학적인 부계혈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성씨의 경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남의 성씨를 빌려 쓴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
7346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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