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 (08) 성씨

한국 성씨의 특징은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남 지역에서 출발한 신라가 한국을 통일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진다.
 
BC 0057 삼국사기(1145)
앞서 조선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干珍村),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육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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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57 삼국사기(1145)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나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에 가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어, 이를 갈라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이를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인(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했고 처음에 큰 알이 박과 같았기 때문에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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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57 박혁거세의 후손
강릉박씨, 고령박씨, 고성박씨, 군위박씨, 면천박씨, 무안박씨, 문의박씨, 밀양박씨, 반남박씨, 사천박씨, 삼척박씨, 상산박씨, 상주박씨, 선산박씨, 순천박씨, 여주박씨, 영암박씨, 영해박씨, 운봉박씨, 울산박씨, 월성박씨, 은풍박씨, 인제박씨, 전주박씨, 죽산박씨, 진원박씨, 창원박씨, 춘천박씨, 충주박씨, 태안박씨, 평주박씨, 평택박씨, 함양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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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사기(1145)
김유신은 왕경인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후한 건무 18년에 구봉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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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유사(1281)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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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삼국사기(1145)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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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김알지의 후손
가평김씨, 감천김씨, 강릉김씨, 강서김씨, 광산김씨, 강화김씨, 개성김씨, 결성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고령김씨, 고양김씨, 공주김씨, 광양김씨, 광주김씨, 괴산김씨, 교하김씨, 구례김씨, 금산김씨, 김녕김씨, 김제김씨, 김천김씨, 김화김씨, 나주김씨, 낙안김씨, 대구김씨, 도강김씨, 문화김씨, 밀양김씨, 배천김씨, 부안김씨, 삼척김씨, 상산김씨, 서흥김씨, 선산김씨, 설성김씨, 수안김씨, 수원김씨, 순천김씨, 신천김씨, 안로김씨, 안동김씨, 안산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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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김부식(1145)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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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송서(488)
고구려왕 고연(高璉,장수왕)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東晋의)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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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양서(636)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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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남사(659)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校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성은 모(募), 이름은 태(泰)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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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제번공직도(1914) 사라국
國王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其王姓募名泰 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성이 모(募)이고 이름이 태(泰)인 왕이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為範 言語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고 나무에 금을 새겨 표시하였다.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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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牟即智寐錦王 모즉지매금왕 --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양서에 나오는 募秦은 신라 사신이 牟即이라 한 것을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치면서 양나라 측에서 중국식 성과 이름으로 오해하고 발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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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9 울주천전리각석
另卽知太王 영즉지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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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4 북제서(636)
是歲高麗靺羯新羅並遣使朝貢 고려, 말갈 그리고 신라가 사신을 통해 조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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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북제서(636)
詔以新羅國王金真興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 현재까지는 이 기록이 신라왕의 성씨가 최초로 나타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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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수서(636)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高祖拜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김진평에 이른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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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북사(659)
傳世三十至眞平以隋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세인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나라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문제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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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9 삼국사기(1145)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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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01 일본서기(720)
장군 소정방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융(隆)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국변성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당에 바쳤다. 급히 인도하여 천자에게 나아가니, 천자는 은혜로운 칙명으로 보자마자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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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24 일본서기(720)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와 국민들이 호례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배를 띄워 비로소 일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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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24 일본서기(720)
-- 삼한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성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지방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은 주류성에 모여 왕조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663년에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한국에 백제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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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삼국사기(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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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 유신비(庾信碑)
軒轅之裔少昊之胤 (김유신은)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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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 김부식(1145)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으로 한다고 하였고 유신비에 또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남가야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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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 한국통일
당나라는 668년에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그리고 676년까지도 신라의 북쪽 국경은 임진강이었는데 이것은 고려왕조가 망하기 전과 같았다. 한국에 고려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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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 신라 9주5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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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ᑀ 한민족의 북방 이주
한국통일이 완성될 676년 당시만 해도 신라의 북쪽 경계는 임진강이었지만 이후 신라 말에 대동강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왕씨고려는 압록강까지, 그리고 이씨조선은 두만강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새로 취득한 영역에는 남부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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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1 신라김씨 흉노유래설
문무왕릉비(681)와 대당고김씨부인묘명(864)을 통해 신라김씨가 흉노왕자의 후손을 자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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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1 김부식(1145)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이 지었고 요극일이 쓴 삼랑사비문에 보인다. -- 김유신의 비문에는 김유신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만 되어 있을 것이고 신라 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을 자처한 것은 삼랑사비문에 나올 것이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 신라 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을 자처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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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신당서(新唐書)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신라왕의 성은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에게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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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 왕씨멸족
왕씨왕조와 이씨왕조는 존속기간이 비슷한데도 전주이씨는 우리 나라 성씨 중 세 번째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반면, 개성왕씨의 수는 많지 않다. 이것은 이씨왕조가 전조의 왕족이었던 왕씨를 멸족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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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창씨개명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하도록 하였는데, 창씨신고 가구수는 8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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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본관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경주 김씨, 경주 이씨 등이 있고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전주 이씨, 전주 김씨 등이 있다. 전주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인데 몽골침입 때 그 시조가 경주에서 전주로 이주하여 전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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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김해 김씨 412만, 밀양 박씨 303만, 전주 이씨 261만, 경주 김씨 174만, 경주 이씨 142만 ● 성씨가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해 김씨는 남가라 수로왕의 후손이고 밀양 박씨는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크게 번창하였고 경주 김씨는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경주 이씨는 신라의 건국에 참여한 양산촌장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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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분포
왼쪽으로부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 그리고 경주 이씨. ❶ 김해 김씨는 남가라 김수로왕의 후손인데 왜 서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가? ❸ 전주 이씨는 전주에서 기원하지만 이조의 건국 이후 한양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런데 왜 영남 지방에만 드물게 분포할까? ❺ 경주 이씨는 경주에서 기원하니 이러한 분포가 자연스럽다. ○ 서남 지역의 김해 김씨와 경기와 영남 이외의 전주 이씨는 자연스러운 분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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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조선일보: 日帝의 창씨개명 강요문서 발견
미즈노 교수는 “당시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신청률이 저조하자 신청률을 높이기 위해 압력을 가했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등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강요한 실태를 알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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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조선일보: 몽골 김씨, 태국 태씨
요즘처럼 세계 각지 사람들이 대거 한국에 와 정착하는 현상은 우리 역사상 전에 없던 일이다. 2000년 49만명이었던 주한 외국인은 이제 120만명으로 늘었다. 이 중 지난해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은 49개국 2만5044명으로 단군 이래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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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거짓과 진실 - 김성회
2010년 신라김씨총연합 대종원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성관은 9개(감천문씨, 강릉왕씨, 곡산연씨, 광주이씨, 수성최씨, 안동권씨, 영양남씨, 철원궁씨, 태안사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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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거짓과 진실 - 김성회
신라김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네 가지 주장이 있는데 모두 역사적 사실로 보기 힘들다. 진흥왕 이전에는 신라 왕의 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김씨 성을 쓴 시조는 신라계에선 진흥왕이, 가야계에선 김유신(또는 조부인 김무력이나 아버지인 김서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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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기원 - 김성회
삼국사기에 전하는 김유신 비문에는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小昊之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김춘추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비문에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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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유래 - 김성회
한서와 후한서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 국왕과 인명기록을 보면 후마(주몽왕)·마와궁(태조왕)·수성(차대왕)·백고(신대왕)로 쓰고 있으며, 삼국지에도 마·궁수성·백고(고국천왕)·유리모(산상왕)·계(고국원왕)·안(광개토왕) 등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진서에 와서야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이라고 칭하고 사신들에 대해서도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성과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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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씨의 역사
원래 고대에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 중 중국식 한자성은 후대에 들어왔으나 선대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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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씨의 의미
성씨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생물학적인 부계혈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성씨의 경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남의 성씨를 빌려 쓴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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