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솔까역사 > 자료 > 一進會
 
1894~1904 매천야록
且自甲午(高宗三十一年)後 東學餘孽 竄伏各地 內爲平民所不齒 外爲地方隊所彈壓 無以肆其怨毒 而潛相署置 以待國家之有事 及始炳等剏一進會 遣其徒 使各起包以應之 不旬日 十三道東學俱動 或稱進步會 或稱進明會 統稱一進支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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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4 매천야록
갑오경장 이후 동학도의 잔당들은 각지에 잠복하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백성들의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았고 밖으로는 지방대에게 탄압되어 아무 횡포도 부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남모르게 부서를 정해 놓고 국가의 유사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윤시병이 일진회를 창설하자 그들은 인원을 각처로 보내 제각기 일어나 호응하도록 하므로 10일도 되지 않아 13도의 동학도들은 모두 일어나 혹 진보회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일진회의 지회로 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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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매천야록
일진회의 강령. 아! 500년 宗社와 삼천리 강토의 위기가 呼吸之間에 놓여 있다. 이런 시국을 생각해 볼 때 누가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본사에서는 몇 사람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一進會」로 칭하고 일심으로 진보할 것을 주의로 삼고 있으니 모든 우리 동포들은 이것을 목적으로 삼고 의무로 삼아, 하나는 개개의 血性으로 勇進할 것이며 또 하나는 단단한 丹衷으로 충군애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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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매천야록
20. 일진회와 지방민의 현혹. 一進會를 창설할 때 尹始炳 등은 서로 속이어 시국이 장차 바뀐다고 하면서 관리를 모두 일진회에서 선출하여, 높은 사람은 정부에 있고 아랫사람은 관찰사와 군수로 있었으므로 비록 鄕長과 里長 자리라도 일진회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면 감히 넘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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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매천야록
일진회 회원들은 모두 단발을 하고 각도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이때 회장 尹始炳은 그의 일당 尹甲炳, 尹吉炳, 廉仲模, 洪錫厚, 金明濬 등과 밀의하여 일본의 후원을 받지 않으면 세력이 외로워진다고 생각하여 일본인에게 의탁하자 일본인들은 그들을 비호하였다. 운영자금까지 주면서 일진회를 대한정치개량본부로 칭하여 그들도 당연히 정치를 참여하여야 한다며 병력을 파견하여 그들의 회의장소를 경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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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매천야록
02. 一進會의 宣言書 게시. 一進會의 尹始炳, 宋秉畯 등이 선언서를 게시하였다. 그 大意는 「우리나라는 멸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므로 공사간의 大小人이 모두 일본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10월 勒約 때의 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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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매천야록
18. 一進會의 西間島 巡視. 9월, 一進會에서 會民 李光洙를 西間島로 파견하여 巡視하였다. 西間島는 압록강 서쪽이자 寧古塔 동쪽에 있는 공허한 지역으로 그곳에 흘러 들어온 우리 백성들이 수만 호나 되었는데, 청국인들은 강제로 관할하여 그 학대를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본국의 관리가 와주기를 바란 지 이미 몇 년이 되었으나 우리 조정에서는 그럴 여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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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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