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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 수서(636)
遼東之役 護兒率樓船 指滄海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高麗相遇 進擊 大破之 乘勝直造城下 破其郛郭 於是縱軍大掠 稍失部伍 高元弟建武募敢死士五百人邀擊之 護兒因却 屯營海浦 以待期會 後知宇文述等敗 遂班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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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01 三國史記(1145) 고려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3대·5성·9시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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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05 三國史記(1145) 고려
既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우문술은 이미 잦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믿었고, 또한 여러 의견에 몰려서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부터 30리 떨어진 곳에다가 산에 의지하여 군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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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06 三國史記(1145) 고려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배의 뒷부분과 앞부분이 수백 리에 이르게 바다에 떠올라 먼저 패수로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아군과 서로 만났는데 이를 대파하였다. ... 내호아가 정예병력 수만 명을 골라 곧바로 성 아래로 나아갔다. ... 숨은 병력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 아군이 추격하여 배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아군이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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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07 三國史記(1145) 고려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아군이 뒤에서 후군을 공격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 처음 9군이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온 것은 겨우 2천7백인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화가 나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일에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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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4 수서(636)
十年 又帥師度海 至卑奢城 高麗舉國來戰 護兒大破之 斬首千餘級 將趣平壤 高元震懼 遣使執叛臣斛斯政 詣遼東城下 上表請降 帝許之 遣人持節詔護兒旋師
614년에 다시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비사성에서 고려와 전투를 벌여 깨트리고 천여명의 목을 베었다. 평양을 취하려 하자 영양왕이 크게 두려워하며 배신자 곡사정을 끌고 요동성 아래에 와 항복을 청했다. 황제가 허락하고 내호아로 하여금 군대를 돌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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