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솔까 이야기 > 솔까한국사 > 남북시대 > 연대기 > 1963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516군사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만든 당이다. 민주당의 색깔 공세에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0여년 전에 불법화된 남로당 지지계층이 공화당 지지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0 보도연맹 학살
해방 직후 한국 민중들은 사회주의를 원했다. 이러한 염원을 반영하여 전국에 걸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미군은 이 인공을 뭉개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우익 폭력조직을 사주하여 좌익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하였다. 대구인민봉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고 제주인민봉기로 이어졌다. 이어서 한국전쟁까지 터지자 미국과 우익은 민중학살로 대응하며 이남 사회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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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0-15 5대 대통령 선거
1963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색깔론으로 박정희를 공격했고 결과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이 각각 47%와 45%로 박빙의 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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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0-17 윤보선, 박정희와 공화당
"간첩 황태성의 자금 20만불을 정치자금으로 써서 공화당을 조직하였다. 박정희가 물러나야 미국의 원조도 증가된다. 박정희의 친형이 10.1폭동사건에 좌익분자로 총살당하였다. 박정희도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관련이 있었다." ● 그러나 국민들은 빨갱이일지도 모르는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당시 이북은 지상낙원을 자처할 만큼 잘 살았는데 반해 이남은 거지와 미군위안부가 우글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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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0-17 윤보선, 부산과 대구
"부산과 대구는 6.25당시 후퇴하지 않은 곳으로 빨갱이가 많고 인민군이 침입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6.25당시 후퇴하지 않은 곳인데 왜 빨갱이가 많고 인민군이 침입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사람이 많을까? 이것은 보도연맹 학살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후퇴하지 않은 곳에서 보도연맹 학살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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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26 6대 국회의원 선거
공화당 110석 득표율 33.5%, 민정당(윤보선) 40석 득표율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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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05-03 6대 대통령 선거
1967년의 대선에서는 두 사람의 득표율이 각각 51%와 41%를 기록하며 격차가 벌어졌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이 성과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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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06-08 7대 국회의원 선거
공화당 129석 득표율 50.6%, 신민당 45석 득표율 32.7% ● 1946년 대구인민봉기를 계기로 미군정은 남로당을 불법화했다. 그러면 그 많던 남로당 지지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일조시대의 지주와 자본가들이 만든 민주당으로 가지는 않았을 테고, 혹시 공화당으로 간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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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04-27 7대 대통령 선거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주당은 1971년 대선에서 불균형 성장을 트집잡고 지역감정을 선동했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득표율이 각각 53%와 45%로 나타나 대세를 바꾸지 못했다. 경제개발의 성과를 내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굳이 지역감정을 부추길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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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05-25 8대 국회의원 선거
공화당 113석 득표율 48.8%, 신민당 89석 득표율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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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생가
박정희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임용이 되지 않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동학농민봉기에 가담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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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생가
윤보선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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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생가
장택상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산 너머에는 장택상 집안의 땅에 소작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는데, 그 농부의 아들이 박정희다. 장택상이 미군정의 수도경찰국장으로 있을 때 대구인민봉기가 일어났는데, 박정희의 형은 선산의 인민봉기를 주도하다 경찰에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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