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地理志 > 0245 東夷 > 北沃沮

北沃沮 → 東夫餘 → 柵城府 → 曷懶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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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志(289)
三國志(289)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23502 SHARED
 
三國志(289)
漢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句麗名城也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15034 SHARED
 
三國志(289)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濵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이 좁고 서남이 길어 가히 천리는 된다. 북쪽으로는 읍루 및 부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예맥과 접했다.
20934 SHARED
 
三國志(289)
北沃沮는 일명 ●置溝婁라고도 하는데 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다. 挹婁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15009 SHARED
 
  三國志(289)
三國志(289)
▐ 옥저는 지금의 길주로 추정되므로 옥저에서 8백리 북쪽은 두만강 유역이다. 뱃길로 노략질당했다고 하니 북옥저의 위치로는 두만강 중하류 지역이 자연스럽다. 북옥저는 -28년에 고구려에 정복당했다. 고구려에서는 城을 溝漊라 불렀으므로 置溝婁란 명칭은 그때 붙여진 듯하다.
23500 SHARED
 
-0032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大白山 동남쪽에 있는 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 4년 후 북옥저를 정벌한 것을 볼 때, 행인국은 맥고려와 북옥저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대백산은 장백산이 되고 행인국은 그 동남쪽인 두만강 상류 지역이 된다. 압록강을 거슬러 행인국으로 가는 길에 구다국과 개마국 인근을 지났을 테지만 각각 한나라 현도군에 소속된 상은태현과 서개마현이라 건드릴 수 없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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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三國史記(1145) 高句麗
王命扶尉猒 伐北沃沮滅之 以其地爲城邑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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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世語曰 頎字孔碩 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 頎之孫)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245년에 다시 정벌하니 궁은 매구로 도망갔다. 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쫓게 했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 동천왕은 옥저와 북옥저를 거쳐 숙신에 이르는 경로로 도주하였고 북옥저를 置溝婁라 부르기도 했다고 하므로 買溝는 置溝婁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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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5 晉書(648)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모용외의 습격을 받고 패하여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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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 廣開土王陵碑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23501 SHARED
 
0410 廣開土王陵碑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무릇 공파한 城이 64개, 村이 1,400이었다. 수묘인 연호 - 賣句余 민은 국연이 2가, 간연이 3가. 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23524 SHARED
 
0410 廣開土王陵碑
▐ 추모왕의 속민이라는 표현은 -28년에 추모왕이 北沃沮를 정복한 것을 말하는 듯하고, 東夫餘는 285년에 夫餘가 망할 때 沃沮로 도피한 왕족들이 세운 나라인 듯하다. 여기에 나오는 賣句는 삼국지(289)에 나오는 買溝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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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5 魏書(554)
이오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곳을 방문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栅城, 남쪽으로는 小海에 이르고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이른다." ▐ 栅城은 삼국지(289)에 나오는 買溝 또는 置溝婁로 보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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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新唐書(1060)
□貃故地為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為南京 曰南海府 領沃睛椒三州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로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염·목·하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며 옥·청·초의 3주를 통치한다. ▐ 예맥과 옥저가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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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新唐書(1060)
0926 新唐書(1060)
20922 SHARED
 
1145 三國史記 高句麗 1
先是 扶餘王解夫婁 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収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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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1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더니 마주 대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었다. (蛙개구리를 蝸달팽이로 쓰기도 한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후사를 내려주신 것이다.”라고 하며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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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2
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濵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冝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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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2
재상 아란불이 “일전에 하늘이 저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다. 너희는 그곳을 피하라. 동해 물가에 땅이 있으니 이름을 가섭원이라 하는데,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이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라며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칭하며 도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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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3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大白山南優㴾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 鴨渌邊室中私之 即徃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23505 SHARED
 
1145 三國史記 高句麗 3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대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여자를 만났다. 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나가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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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3
▐ 扶餘에서 동해에 이르는 길은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가장 자연스럽다. 따라서 東扶餘는 두만강 하류에 있었던 듯하다. 이곳은 삼국지(289)에서 北沃沮로 불리던 지역으로 광개토왕릉비(414)에는 東夫餘로 나타난다. 추모왕 시기에는 동부여가 없었고 광개토왕릉비(414)부터 삼국사기(1145) 이전의 기록에 실려있는 어떤 추모설화에도 동부여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추모설화에 나오는 동부여 이야기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23512 SHARED
 
1145 三國史記 高句麗 4
금와가 방 안에 가두었는데, 해가 비추어 몸을 끌어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와 비쳤다. 그로 인하여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자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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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5
골격과 의표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 7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을 朱蒙이라 하는데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맏아들 帶素가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며 용감합니다.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를 제거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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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6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줄여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하였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아차리고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머물다가 욕을 당하는 것보다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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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7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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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7
주몽이 烏伊·摩離·陜父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일명 개사수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없었다.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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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8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音述水 遇三人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夲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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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8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에 이르러(위서에는 음술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명을 만났다.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렀다.(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高를 성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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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8
1145 三國史記 高句麗 8
▐ 大白山은 장백산인 듯하므로 大白山南優㴾水은 두만강인 듯하고 그렇게 설정하면 동부여의 위치와도 어울린다. 유화는 熊心山下鴨渌邊에서 장백산 너머 이곳으로 쫓겨난 듯하다. 鴨綠東北에 있으면서 두만강 유역에서 고구려의 발상지로 오기 위해 건너야 할 강은 송화강이나 그 지류 밖에 없다. 따라서 淹淲水·盖斯水는 송화강 유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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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高句麗 9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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