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는 新羅에 침입한 高麗와 전투를 치렀는데, 그곳은 이듬해에 倭가 다시 新羅와 전투를 치른 㖨일 가능성이 높다. 倭가 高麗를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新羅가 되찾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加羅를 고령으로 비정하는 것은 비교적 근거가 충분한데, 㖨己呑은 加羅와 新羅의 경계에 있었다고 하므로 달구벌에 어울린다. 이곳은 倭가 新羅를 치러 왔다가 나루에서 방향을 바꾸어 加羅를 쳤다는 이야기의 무대로도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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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日本書紀(720)
신라가 왜를 받들지 않자 왜가 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沙至比跪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己本旱岐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쳤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木羅斤資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7251#7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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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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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02 日本書紀(720)
新羅王은 高麗軍이 모두 新羅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高麗王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任那王이 膳臣 반구, 吉備臣 소리, 難波吉士 적목자에게 권하여 新羅를 구해주도록 했다.
7251#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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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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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5.03 日本書紀(720)
기소궁숙니 등이 곧 신라에 들어가 이웃 군을 같이 공격하였다.
新羅王 夜聞官軍四面鼓聲 知盡得喙地 與數百騎亂走
신라왕은 밤에 관군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喙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기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소궁숙니는 쫓아가 진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喙地悉定 遣衆不下
喙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725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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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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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 0529 多沙津 분쟁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압산신을 통해 가라의 多沙津을 청하자 왜는 이를 주었다. 이에 가라왕은 왜를 원망하며 신라와 우호를 맺고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나 의관 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신라는 왕녀를 돌려달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신라는 지나는 길에 刀伽, 古跛, 布那牟羅 세 성을 함락시키고 북쪽 변경의 다섯 성도 쳤다.
이즈음 가라와 신라 사이에 있던 喙도 다시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7251#2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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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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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4 @녹기탄 @㖨己呑
比自㶱과 加羅를 각각 창녕과 고령으로 비정하는 것은 비교적 근거가 충분하다.
倭는 新羅에 침입한 高麗와 전투를 치렀는데, 그곳은 이듬해에 倭가 다시 新羅와 전투를 치른 㖨일 가능성이 높다. 倭가 高麗를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新羅가 되찾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㖨己呑은 加羅와 新羅의 경계에 있었다고 하므로 달구벌이 어울린다.
이곳은 倭가 新羅를 치러 왔다가 나루에서 방향을 바꾸어 加羅를 쳤다는 이야기의 무대로도 어울린다.
7251#26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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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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㖨·喙·啄·梁·涿
沙喙(524 봉평신라비)-沙㖨(720 일본서기)-沙梁(1145 삼국사기)-沙涿(1281 삼국유사)┆喙己呑·㖨己呑(720 일본서기)┆啄評(636 양서)-喙評(801 통전)┆㖨國·喙地(720 일본서기)-達伐·達句伐(1145 삼국사기)
▐ 달구벌과 서라벌의 지명에 나오는 喙·達·㖨·梁·啄·涿은 모두 같은 발음을 표기한 듯하다. 최치원은 신라인들이 연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중국의 涿水에서 지명을 땄다고 했다.
7251#26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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