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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三國史記(1145)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1906#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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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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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三國史記(1145)
백제가 처음에 한수 이북에 도읍을 정했다가 한수 이남으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광진은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는' 조건에 부합한다. 말갈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철원에서 연천이나 포천을 거쳐 중계천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이곳에 이른다. 춘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칭 낙랑이 침략할 때도 서울 송파에 비해 이곳이 쉽다.
1906#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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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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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0037 東有樂浪
왕 최리가 32년에 고려의 호동 왕자에게 딸을 시집보냈다가 37년에 고려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망하자 그 유민이 신라로 흘러간 낙랑은 36년, 14년 그리고 4년에 신라를 침공한 낙랑이다. 이 낙랑은 -2년에 백제를 침공하고 -8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한 낙랑이기도 하다. -6년에 백제는 이 낙랑을 東有樂浪이라 했다.
1906#7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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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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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고전기(古典記)
13대 근초고왕 때인 함안 원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楊州)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 근초고왕이 침공한 평양은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이다. 그때 고국원왕이 전사했는데 그가 북한산까지 내려와 머무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제 초기에 외침을 피해 한수 이북 위례성에서 한수 이남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굳이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1906#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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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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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 거련(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阿且城)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1906#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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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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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 日本書紀(720)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³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³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平壤을 대동강 유역의 平壤²으로 보기에는 정황상 무리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서울 광진구에 있었던 平壤³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1906#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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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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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09 三國史記(1145)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의 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을 공격해 왔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190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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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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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5.01 三國史記(1145)
春正月 憲昌子梵文與髙逹山賊夀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³ 攻北漢山州 都督聦明率兵 捕殺之 平壤³今楊州也 太祖製□義寺齋文 有高麗舊壤平壤³名山之句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 산적 수신 등 1백여 명과 반역을 모의하고 평양³에 수도를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니, 도독 총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를 잡아 죽였다. 평양³은 지금의 양주이다. 왕건이 지은 장의사 제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³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1906#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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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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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남경유수관 양주는 본래 고구려의 北漢山郡(南平壤城이라고도 한다)으로 백제의 근초고왕이 차지하였다. 근초고왕 25년에 南漢山에서 도읍을 옮겼다. 개로왕 20년에 이르러 고구려 자비왕이 쳐들어와서 漢城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나와 도망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그 해 아들 문주왕이 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뒤에 신라 진흥왕 15년에 北漢山城으로 와서 국경을 정하였다. 진흥왕 17년에 北漢山州를 창설하고 軍主를 두었다. 경덕왕 14년에 漢陽郡으로 고쳤다
1906#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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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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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
아차산에서 신라 유적과 함께 北漢山城이라는 명문의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아차산이 신라의 북한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는데, 고려가 차지해서 北漢山郡을 설치하고 平壤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라가 차지해서는 新州에 소속시켰다가 557년에 신주를 폐하고 이곳에 北漢山州를 설치했다. 568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南川州를 설치했다가 604년에 다시 남천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했다. 경덕왕때는 漢陽郡으로 바꾸었다.
왕고때 이곳은 楊州였다.
1906#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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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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