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08 ~ AD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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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21 야쓰이 비망록
세키노와 야쓰이 세이이치는 1909년 석암동 갑분에서 2세기께 한나라 계통의 벽돌무덤과 연호문경, 칠기류 같은 주목할 만한 유물들을 찾아내고도 평양은 고구려 도읍이란 선입관에 갇혀 고구려 무덤일 것이란 막연한 결론으로 유적의 성격을 미봉해버렸다. 도리이는 고구려 적석총 무덤과 평양의 한나라계 무덤이 구조상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석암동 고분이 평양의 고구려 무덤에 선행하는 낙랑시대 것이라는 견해를 일찌감치 끌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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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21 야쓰이 비망록
1916년 시작된 총독부 고적조사는 평양 석암동 9호분 귀틀무덤을 포함한 10기의 고분을 파는 대발굴 사업으로 막을 올렸다. 현재 국보 89호로 지정된 금제동물문 띠고리 장식과 현란한 무늬의 칠기류, 거울, 제사용 술을 바치는 용기인 동정, 장식철검 등 눈이 휘둥그레질 유물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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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서울 호구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소장유물자료집8 ‘각정동직업별호구조서(各町洞職業別戶口調書)’에 따르면, 1934년 말 당시 서울시 인구 39만4525명 중 ‘내지인’이라 불린 일본인은 10만9682명(28%)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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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대동강 남안의 낙랑구역은 낙랑 토성과 수많은 한묘가 발견되어 이곳을 낙랑의 치소로 비정하는 데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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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구역
락랑구역 토성리에는 토성터가 있고 주변에는 한(漢)/진(晋)대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분묘군(낙랑한묘)이 있다. 일조시대에 행해진 발굴의 결과, 토성리 토성에서는 건물·도로·창고군이나 낙랑의 문자를 기록한 기와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낙랑군의 정부였다고 추정하며 '낙랑토성'으로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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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토성(樂浪土城)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토성리에 있는 낙랑시대의 토축성.
성 안에서는 집터·관청·도로·하수도 등의 자취가 발굴되었고, 유물로는 막새기와·벽돌·봉니(封泥)·거울·화폐와 화폐를 주조하였던 틀, 구리화살촉·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글자가 새겨진 기와·벽돌·거울·도장 등이 많이 나왔다.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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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리 154호분
후한대의 벽돌널방이다. 전실과 후실이 있고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은 무늬가 있는 벽돌로 만들었다.
부식된 목관과 짙은 옷칠을 한 칠기 용기, 반구·괴수·이파리 모양의 금속장식구, 쇠뇌, 벼루, 낙랑계토기, 오수전 등 많은 부장품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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