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의 무덤이다.
•
-0082 남부도위 치소 소명(昭明, 漢城)
진번이 폐지될 때 15개 현 중 7개 현을 낙랑군 남부도위로 재편하고 치소를 소명에 두었다. 신천과 안악 일대에 한사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곳에 위치한 동수묘는 한사군과 고려를 이어주는 의미가 있다.
10923
•
-0082 남부도위 치소 소명(昭明, 漢城)
10925
•
0265~0316 진서(648) 平州
276년 10월에 창려, 요동, 현토, 대방, 낙랑 5군국을 갈라 평주를 설치하였다. 26현 18100호다.
평주(5군국,26현,18100호) - 창려군(창려,빈도), 요동국(양평,문,거취,낙취,안시,서안평,신창,역성), 낙랑군(조선,둔유,혼미,수성,누방,사망), 현토군(고구려,망평,고현), 대방군(대방,열구,남신,장잠,제해,함자,해명).
● 동수의 관직 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는 晋의 평주 5군국 중 4군을 포함한다.
여기서 창려는 요서 지역이다.
10899
•
0290-0390 三韓의 재편
311년에 고려는 서안평을 공격하고 313년과 314년에는 낙랑과 대방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342년에는 전연의 침공을 받아 도읍이 파괴되었다.
1226
COMMENT
•
0294↤ 진서(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秦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7520
•
0296-08 삼국사기(1145)
慕容廆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 西川之原은 고국원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는 아직 고려가 낙랑을 차지하고 못했던 시기다.
2178
COMMENT
•
0313 자치통감(1084)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 고립되어 있던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병합되었다.
10900
•
0316 晉(西晉) 멸망
311년 흉노족은 진의 수도인 洛陽을 약탈하고 황제를 죽였다. 진은 고대의 수도였던 長安에 새 황제를 세우고 나라를 재건했지만 이는 이민족의 침입을 잠시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316년 사마염의 손자인 민제는 흉노족의 부족장에게 항복하고 퇴위했다가 후에 살해당했다.
10902
•
0333 진서(648)
皝遣其弟建武幼 司馬佟壽等討之
황(皝)이 그 동생 건무장군 유(幼)와 사마 동수 등을 보내어 토벌하였다.
仁盡眾距戰 幼等大敗 皆沒於仁
인(仁)이 군대를 다하여 막아 싸우니, 유(幼) 등이 대패하므로 다 인(仁)에게 함몰되었다.
● 이때 동수는 仁에게 붙었다.
41541
COMMENT
•
0336 자치통감(資治通鑑)
慕容幼 慕容稚 佟壽 郭充 翟楷 龐鑒皆東走 幼中道而還 皝兵追及楷 鑒 斬之 壽 充奔高麗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동수(佟壽), 곽충(郭充), 적해(翟楷), 방감(龐鑒)은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유(幼)는 도중에 돌아왔고 황(皝)의 군사가 추급하여 적해, 방감은 베어죽이고, 동수, 곽충은 고려로 달아났다.
41543
COMMENT
•
0337~0370 연(前燕)
요서 일대에 살던 모용(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조(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업(鄴)으로 옮겼다. 370년 진(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10915
•
0342-11 삼국사기(1145)
(고려) 모용황이 스스로 굳센 병력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오고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 병력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도로 나와 침략해 왔다.
왕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 단웅곡으로 들어갔다. 장군 모여니가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갔다.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
10914
•
0343 천도
고려는 전연의 침공을 받은 다음 해에 도읍을 환도성에서 평양 동쪽으로 옮겼다가 백제의 침공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자 다시 국내성으로 되돌아갔다.
10922
•
0343-02 삼국사기(1145)
(고려) 왕이 그의 동생을 연(前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10919
•
0348 장무이묘(張撫夷墓)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구봉리(舊地名 : 미산면 오강동)에 위치한 전축분으로, 인근 주민들은 여러 명의 인골을 모아 장사를 지냈다는 의미로 ‘도총(都塚)’이라 부르며, 내부에서 ‘대방태수 장무이(帶方太守 張撫夷)’라고 적힌 명문전이 발견되어 ‘장무이묘’라고도 한다.
● 동수묘의 묵서명에 나오는 護撫夷校尉를 떠올리게 한다.
10926
•
0349 삼국사기(1145)
(고려) 왕이 전(前) 동이호군 송황(宋晃)을 연(燕)으로 보내다. 연왕 모용준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바꾸어 활(活)이라 하고 벼슬을 내려 중위(中尉)를 삼았다.
10917
•
0353 영화9년명 문자전돌
永和九年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353년에 요동·한·현도군을 관할하는 태수인 동리가 만들었다.
● 요동과 현도는 晋의 평주 5군국 중 2군국이다. 이 당시 요동은 모용 선비가 차지하고 있었고 현도는 고려가, 韓은 백제와 신라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41536
COMMENT
•
0355 삼국사기(1145)
(고려)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 征東大將軍은 2품이다.
자사는 주의 행정 장관인데 영주는 전연때 사용되지 않은 지명이어서 營州刺史가 허구의 관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公은 5등급 작위다.
10916
•
0357 묵서명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廿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
출신 동수는 자는 □안인데 나이 69세에 관으로 있다가 죽었다.
41519
COMMENT
•
0357 묵서명
● 평곽은 요동 반도에 있는 지금의 개주시다.
● 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는 서진의 평주 5군국 중 요동을 뺀 4군을 관할하는 직책이라는 뜻이다.
창려는 요서 지역인데 307년 모용외가 자립을 선언할 때부터 모용 선비의 차지가 되었다.
낙랑과 대방은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는데, 모용외는 그 유민을 받아 낙랑군을 따로 설치하여 안집하였다.
현도는 명목상 고구려현을 포함하는데,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은 342년에 고려를 침공하여 도읍을 파괴하 ...
10903
•
0357 백라관
● 신당서와 구당서에 고려왕은 백라관을 쓴다는 기록이 있어 이 인물을 고려왕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고려왕이 아닌 게 분명한 진묘의 인물도 백라관을 쓰고 있고 장회태자묘에는 백라관을 쓴 당나라 사람이 여럿 등장하고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10921
•
0357 행렬도
주인공의 좌우 바깥쪽에 8기의 개마무사가 배치되어 있다.
1236
COMMENT
•
0371-10 삼국사기(1145)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 고국원왕의 장사지는 故國之原이고 故國原은 서천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서천왕의 무덤은 낙랑과 대방을 병합하지 못했을 때 만들어졌다. 안악3호분은 옛 대방 지역에 있으므로 고국원왕의 무덤이 될 수 없다.
41518
COMMENT
•
동북아역사재단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 벽화고분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동수(冬壽)로 진서(晉書)와 자치통감에 나오는 동수(佟壽)로 추정된다.
명문에 있는 ‘永和十三年’는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에 해당된다.
38483
COMMENT
•
위키백과
남북일렬로 여러 방을 배열하고 앞방 좌우에 옆방을 두는 것은 한대 벽돌무덤의 기본 설계법이고 옆으로 넓어진 앞방에 사각형의 주실을 달아 T자형 평면을 만드는 것은 낙랑의 덧널무덤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보인다. 또 큰 판석으로 묘실을 짜는 것은 요동의 한대 묘에서 볼 수 있고 모줄임천장, 팔각형 돌기둥 그리고 기둥에 두공을 얹어 천장석을 받들게 하는 것은 산동 기남의 후한 대돌무덤과 같다. 묘주들이 휘장을 친 방안에 앉아 있는 모습은 요동의 고분과 같다.
1360
COMMENT
•
행렬도
위키백과에는 진과 16국 시대의 무장 항목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여 놓았다.
"Procession of Dong Shou, a general of Former Yan or Eastern Jin origin"
'전연 또는 동진 출신의 장수 동수의 행렬'이라는 뜻이다.
● 동수는 고려에 망명하였고 무덤이 있는 곳도 314년 이후 고려가 점유한 대방 지역에 위치해 있으므로 행렬도는 고려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낙랑의 고분 벽화를 잇는다.
1089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