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012 ☱ 高句麗 > -0107 고려의 어원

산 위에 쌓은 城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高城이라 할 만하다. 고구려에서는 城을 구루라 했으므로 高城은 高구루가 된다. 구루를 삼국지(289) 시기에는 溝婁라 표기했지만 -107년에는 句驪라 표기했을 수 있다. 이것이 高句麗의 어원인 듯하다. 오녀산성이 이 조건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로 城 아래 물가에 살았기 때문에 忽本이란 沸流谷의 지명을 사용하였고 高句麗는 한나라에 의해 주로 사용된 듯하다.
 
-0107 漢書(82)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 縣三 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현도군(무제 원봉 4년에 설치했다) 현이 세 개다.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 ▐ 다른 군과 통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현의 수는 대체로 군을 설치한 뒤 줄어든다. 따라서 고구려현도 -107년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1112#23824 SIBLINGS CHILDREN 23824
 
-0028 三國史記(1145)
王命扶尉猒 伐北沃沮滅之 以其地爲城邑 (고구려)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11112#23819 SIBLINGS CHILDREN 23819
 
0082 漢書
高句驪(7) ▐ 한서는 고구려가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이다.
11112#23822 SIBLINGS CHILDREN 23822
 
0289 三國志
今胡猶名此城為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11112#15115 SIBLINGS CHILDREN 15115
 
0289 三國志
北沃沮一名置溝婁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고도 한다. ▐ 북옥저는 -28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므로 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溝婁란 말이 북옥저에도 적용된 듯하다.
11112#17033 SIBLINGS CHILDREN 17033
 
0289 三國志
高句麗(11) 下句麗(1) 句麗(24) 高句驪(5) 句驪(6) ▐ 句麗가 말의 뿌리고 高는 꾸밈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1112#23823 SIBLINGS CHILDREN 23823
 
0289 三國志(289)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世語曰 頎字孔碩 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 頎之孫)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245년에 다시 정벌하니 궁은 매구로 도망갔다. 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쫓게 했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 동천왕은 옥저와 북옥저를 거쳐 숙신에 이르는 경로로 도주하였고 북옥저를 置溝婁라 부르기도 했다고 하므로 買溝는 置溝婁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11112#10027 SIBLINGS CHILDREN 10027
 
0414 廣開土王陵碑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履龍頁昇天 강물을 건너가서 沸流谷 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11112#11103 SIBLINGS CHILDREN 11103
 
0414 廣開土王陵碑
▐ 산 위에 쌓은 城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高城이라 할 만하다. 고구려에서는 城을 구루라 했으므로 高城은 高구루가 된다. 구루를 삼국지(289) 시기에는 溝婁라 표기했지만 -107년에는 句驪라 표기했을 수 있다. 이것이 高句麗의 어원인 듯하다. 오녀산성이 이 조건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로 城 아래 물가에 살았기 때문에 忽本이란 沸流谷의 지명을 사용하였고 高句麗는 한나라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을 듯하다.
11112#17217 SIBLINGS CHILDREN 17217
 
0414 廣開土王陵碑
(410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다. 무릇 공파한 城이 64개, 村이 1,400이었다. 수묘인 연호 - 賣句余 민은 국연이 2가, 간연이 3가. 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 여기에 나오는 賣句는 삼국지(289)에 나오는 買溝인 듯하다.
11112#10039 SIBLINGS CHILDREN 10039
 
0554 魏書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為氏焉 주몽과 함께 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성을 고씨라 하였다. ▐ 紇升骨城은 광개토왕릉비(414)에 나오는 '沸流谷 忽本 서쪽 산 위에 쌓은 성'에 대응된다. 그렇다면 紇升骨은 沸流谷 忽本이다.
11112#15100 SIBLINGS CHILDREN 15100
 
1060 新唐書
□貃故地為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로 책성부라고도 한다. 沃沮故地為南京 曰南海府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라 한다. ▐ 여기서 예맥과 옥저는 바뀌어 있다. 따라서 책성부는 옥저의 옛 땅이다. 북옥저는 城을 溝婁라 부른 고구려의 언어가 적용되어 置溝婁라 불렸는데, 발해가 옥저의 옛 땅을 柵城이라 부른 것은 그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11112#11101 SIBLINGS CHILDREN 11101
 
1145 三國史記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夲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11112#15112 SIBLINGS CHILDREN 15112
 
1145 三國史記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卒夲川에 이르렀다. (위서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 沸流水와 卒夲川은 광개토왕릉비(414)에 나오는 沸流谷 忽本과 위서(554)에 나오는 紇升骨에 대응된다.
11112#23820 SIBLINGS CHILDREN 23820
 

11112#9908 SIBLINGS CHILDREN 9908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11112#10008 SIBLINGS CHILDREN 10008
 

11112#9911 SIBLINGS CHILDREN 9911
 
한국학중앙연구원 - 노태돈
高句麗의 어원은 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돈황문서(敦煌文書) 등에서 高句麗를 무구리(畝久理)라 하였다. 이는 맥구려(貊句麗) 즉 貊族의 句麗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곧 高句麗에서 句麗가 어간이고, 高는 관형사임을 말해준다. 고구려어에서 城을 구루(溝漊) 또는 홀(忽)이라 하였다. 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高句麗는 句麗에다가 크다 또는 높다는 뜻의 高를 덭붙인 말로서, 큰 고을 또는 높은 성의 뜻을 지닌 말이다.
11112#9526 SIBLINGS CHILDREN 9526
 
한국학중앙연구원 - 임기환
삼국지 관구검전(毋丘儉傳)에 의하면 관구검의 침입으로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이 매구(買溝)로 도망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의 매구는 같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옥저전(東沃沮傳)에 나타난 북옥저의 다른 이름인 치구루(置構婁)와 서로 통한다. 매구는 매구루(買溝婁)의 약칭으로 볼 수 있다.
11112#9894 SIBLINGS CHILDREN 9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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