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삼한시대 연대기 > 391년부터 474년 사이 > 0391 (<249) 일본서기(720)
 
 0391-0474 倭의 韓國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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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82(<-262) 일본서기(720)
백제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왕 己本旱岐와 아들 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 등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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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82(<-262) 일본서기(720)
가라국왕의 누이 旣殿至가 大倭로 가서 “천황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라에 모여 그 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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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국사편찬위원회 해석 49년 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탄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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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1
49년 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탄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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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1
卌九年春三月、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則與久氐等共勒兵而度之、至卓淳國、將襲新羅。時或曰「兵衆少之、不可破新羅。更復、奉上沙白・蓋盧、請増軍士。」卽命木羅斤資・沙々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但木羅斤資者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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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2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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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2
倶集于卓淳、擊新羅而破之、因以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仍移兵西廻、至古爰津、屠南蠻忱彌多禮、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亦領軍來會、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自然降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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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3
그래서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목라근자 등이 의류촌(지금은 주류수기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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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3
是以、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共會意流村今云州流須祇、相見欣感、厚禮送遣之。唯千熊長彥與百濟王、至于百濟國登辟支山、盟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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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4
다시 고사산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 년 만 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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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3(<-249) 일본서기(720) 4
復登古沙山共居磐石上、時百濟王盟之曰「若敷草爲坐恐見火燒、且取木爲坐恐爲水流、故居磐石而盟者示長遠之不朽者也。是以、自今以後、千秋萬歲、無絶無窮、常稱西蕃、春秋朝貢。」則將千熊長彥至都下、厚加禮遇、亦副久氐等而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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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4-08(<-284) 일본서기(720)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아직기는 또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은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의 조상인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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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20(<-294) 일본서기(720)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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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20(<-294) 일본서기(720)
백제기에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에서 전횡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귀국에 갔다가 돌아와 천조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천조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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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의 기록 보정
일본서기에 사건의 왜곡은 있어도 사건의 날조는 없다. 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내용상 가장 근접한 기록은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391년과 그 이후의 기록이다. 두 기록은 모두 왜(倭)가 우위에 서서 한국에 진출했고 백제가 이에 협조했다고 하는 점에서 줄거리가 같다.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은 391년에 있었던 사건을 옮겨 놓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http://qindex.info/i.php?f=318#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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