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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 三國志(289)
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秦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燕과 齊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1748#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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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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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5± 史記(-91)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1748#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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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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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7 後漢書(445)
왕경은 자가 중통인데 낙랑 남감 사람이다. 8세조 仲은 낭야 불기 사람인데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았다. 여씨가 횡포를 부리자 유애왕 襄이 군사를 일으키려 여러 차례 仲에게 자문을 구했다.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켜 병사의 일을 그에게 맡기려하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바다 건너 낙랑의 산 속으로 도망가 정착해 살았다.
▶이때는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이므로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훗날 낙랑이 되는 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48#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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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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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위만조선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1748#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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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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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위략(265±)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 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조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1748#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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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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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랑구역
락랑구역 토성리에는 토성터가 있고 주변에는 漢/晋대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분묘군(낙랑한묘)이 있다. 일조시대에 행해진 발굴의 결과, 토성리 토성에서는 건물·도로·창고군이나 낙랑의 문자를 기록한 기와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낙랑군의 정부였다고 추정하며 '낙랑토성'으로도 부르고 있다.
1748#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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