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의 기록인 聱漢文集과 亂中雜錄에서 명나라 장수 유정이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원숭이 여러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 하나, 150여년 후 擇里志에서 명나라 장수 양호가 원숭이 기병을 1597년의 소사 전투에 투입하였다는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만들어진 이야기는 다시 100여년 후의 世傳書畵帖 그림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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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1566 萬曆野獲編(1618)
척계광이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강남에 와서 병졸들로 하여금 산 속에서 조총을 익히게 했는데 숲 속에 있던 원숭이들이 그것을 보고 흉내를 냈다.
오래 지나자 원숭이들의 기술이 사람보다 나아졌다.
하루는 왜구가 많이 쳐들어왔는데 척계광의 군대는 수가 적어 맞서 싸우기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용맹한 병사들을 숨겨두고 날랜 병사들로 하여금 적을 자극하게 한 뒤 거짓으로 달아나게 하였다. 화기는 모두 산 속 움푹한 곳에 미리 버려 두었다.
1239#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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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1566㊟
▐ 당시의 총은 끈에 불을 붙여 가지고 있다가 이 불로 화약을 터뜨려 총알이 나가게 하는 방식이다. 한 발의 총을 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복잡해서 원숭이를 훈련시켜 쏘게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萬曆野獲編(1618)이나 五雜俎(1644-) 모두 원숭이는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만 했을 뿐, 적을 무찌르는 일은 잠복하고 있던 군사들이 하였다고 한다.
1239#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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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08.27 亂中雜錄(조경남)
제독 유정이 친히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부터 임실에 도착하였다. 군졸이 먼저 남원에 이르렀다. 그 가운에 우지개 3명이 있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10배요, 해귀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고, 초원 4마리가 있었는데 말을 타고 부리는 것이 사람과 같고 몸뚱이가 큰 고양이를 닮았다. 낙타·생노루·3희생과 잡물 등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1239#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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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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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擇里志 - 1826 이전 無名子集
1597년에 왜적이 양원을 남원에서 격파하고 전주를 거쳐 공주로 북상할 때, 경리 양호가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에 당도하였다. 연광정에서 한창 저녁밥을 먹는 도중에 비마의 급보가 이르자, 양호는 즉시 말에 올라 평양으로부터 한양에 이르는 칠백 리 길을 하루 낮 이틀 밤에 달려가, 달단의 장수 해생·나귀·새귀·양등산 등 네 명으로 하여금 철기 4천과 농원 수백 기를 거느리고 소사교 아래에 매복하게 하였다.
1239#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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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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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擇里志 - 1826 이전 無名子集
왜적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백여 보 앞에 이르자 먼저 농원을 풀어놓으니 원숭이들은 말에 올라 채찍을 잡고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국에는 본래 원숭이가 없어 사람 같기도 하고 사람도 아닌 원숭이를 처음 보고는 모두 괴이한 마음이 들어 진군을 멈추고 멀거니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원숭이가 즉시 말에서 내려 진중으로 돌입하니 왜적들이 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원숭이가 몸을 잘 피하여 온 진중을 꿰뚫고 지나가서 진영이 흐트러졌다.
1239#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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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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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 일반적으로 전투에 鐵騎를 가장 먼저 투입하는 것을 고려할 때, 㺚將이 이끄는 鐵騎보다 먼저 전투에 투입된 弄猿數百騎는 중국 남부의 狼兵과 같은 부대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채찍을 가하여 적진으로 돌진하거나(騎馬執鞭鞭馬突陣)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들어가거나(下馬入陣中) 요리조리 피해 진중을 뚫고 지나가는(善躱避貫穿一陣) 정도의 일은 잔나비가 할 수도 있다.
1239#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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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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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 萬曆野獲編(1618)이나 五雜俎(1644-)에 나오는 이야기를 척계광이 왜구를 교란하는 데 잔나비를 활용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척계광이 1566년 이후 북쪽 변경으로 임지를 옮겼을 때 이 기술을 달단으로 가져갔고, 그것이 그곳의 기마 전술과 결합하여 잔나비 기병으로 발전했으며, 조일전쟁에 참전한 㺚將이 鐵騎와 함께 그 잔나비 기병을 이끌고 조선에 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는 있다.
1239#26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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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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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 그러나 그런 잔나비 부대는 특이하기도 하지만 규모도 크고 전공도 세웠기 때문에 명나라 측의 기록에 나와야 자연스러운데,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조의 기록에도 소사 전투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15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聱漢文集과 亂中雜錄에 나오는 정도의 이야기만 역사적 사실이고 소사 전투 이야기는 세월이 흐르며 萬曆野獲編(1618)이나 五雜俎(1644-)의 사례처럼 부풀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1239#26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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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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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7 안대회의 논문
원숭이 부대의 이야기를 기록한 택리지가, 원숭이 부대가 활동했다는 소사 전투가 일어나고 150여년 뒤에 편찬된 서적이라 신빙성에 의문이 있어 왔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도 명군이 원숭이 몇 마리를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확인됨으로써, 원숭이 부대가 실재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 임진왜란 전에 명나라 척계광이 원숭이 부대를 운용했었다는 기록과 후대에 그려진 세전서화첩에 원숭이 그림이 나오는 것이 덧붙여졌다.
1239#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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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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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7 안대회에 반론
원숭이 부대에 대한 기록이 중국 측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안대회는 해귀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지만 중국 측에 없는 것처럼 원숭이 부대도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일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해귀와 원숭이 부대는 비중이 전혀 다르다. 해귀는 전과가 없고 원숭이 부대는 전과가 있다. 또 규모가 크기 때문에 운용에도 적잖은 부담이 가는 부대다. 그 존재가 사실이라면 중국 측의 기록에도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239#2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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