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명나라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원숭이 부대를 투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어원
ᐥ한국은 중국인의 후손 한씨가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ᐥ
•
-0202-0220 汉代猿骑图像
한나라의 그림에는 원숭이가 말이나 낙타를 타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원숭이가 말을 타는 서커스는 있다.
2374
COMMENT
•
0317? 업중기(鄴中記)
衣伎兒作獼猴之形走馬上或在脅或在馬頭或在馬尾馬走如故名為猿騎
광대의 옷을 입고 원숭이 모양을 한 뒤 말을 타고 달리는데, 때로는 옆구리에 있다가 때로는 말머리에 있다가 때로는 말꼬리에 있었다. 그래도 말은 예전처럼 달렸는데, 이런 놀이를 원기라고 한다.
3630
COMMENT
•
1553-1566 만력야획편(1618)
戚少保(繼光)初以征倭至江南,命士卒於山中習放鳥銃火鼠之屬,適林莽中有群猴,見而竊效之。
久之,猴之技勝於人矣。
一日倭大至,而戚兵少,度與戰必不利,乃匿勇壯於隱處,而以輕銳挑之佯北,先擲諸火器於山坳內,倭之追得尋至,猴見髡跣橫行,不類所習睹,疑爲異獸將噬之,爭燃火發炮,倭大駭狂奔,死者枕籍。
伏兵四起,遂獲全捷。
3708
COMMENT
•
1553-1566 만력야획편(1618)
척계광이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강남에 와서 병졸들로 하여금 산 속에서 조총을 익히게 했는데 숲 속에 있던 원숭이들이 그것을 보고 흉내를 냈다.
오래 지나자 원숭이들의 기술이 사람보다 나아졌다.
하루는 왜구가 많이 쳐들어왔는데 척계광의 군대는 수가 적어 맞서 싸우기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용맹한 병사들을 숨겨두고 날랜 병사들로 하여금 적을 자극하게 한 뒤 거짓으로 달아나게 하였다. 화기는 모두 산 속 움푹한 곳에 미리 버려 두었다.
3712
COMMENT
•
1553-1566 만력야획편(1618)
왜구가 뒤쫓아 가자 원숭이들이 맨발에 머리를 밀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평소에 눈에 익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른 종족이 쳐들어와 공격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앞다투어 화기에 불을 붙여 쏘았다. 왜구가 크게 놀라 이리저리 날뛰었고 죽은 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이때 숨어있던 병사들이 사방에서 뛰쳐나와 마침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3713
COMMENT
•
1553-1566 오잡조(五雜俎 1644 이전)
복청 석축산에는 원숭이가 많아 천 백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척계광이 왜구를 토벌할 때 병사들을 이곳에 주둔시켰는데, 군사들에게 화기를 가르칠 때마다 원숭이들이 그것을 보고 따라했다. 이에 군사들로 하여금 수 백 마리를 잡아 기르게 하고 화기에 숙달되도록 훈련시켰다.
3703
COMMENT
•
1553-1566 오잡조(五雜俎 1644 이전)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병사들을 골짜기에 잠복시켜 두고 원숭이 무리로 하여금 적의 진영을 엿보게 하였는데 적들은 원숭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한꺼번에 화기를 쏘자 천둥같은 소리에 땅이 울리고 적들은 크게 놀랐다. 이때 잠복하고 있던 군사들이 적을 모두 섬멸하였다.
3704
COMMENT
•
1597 소사 전투에서 승리한 양호(楊鎬)
그는 1597년 소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듬해에 울산 도산성 전투에서 패했는데 승리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가 파직되었다.
※양호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 놓은 비는 모두 4기로, 1598년·1610년·1764년·1835년에 각각 세웠다.
3614
COMMENT
•
1598-08-27 난중잡록(亂中雜錄 조경남)
제독 유정이 친히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부터 임실에 도착하였다. 군졸이 먼저 남원에 이르렀다. ... 그 가운에 우지개 3명이 있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10배요, 해귀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고, 초원 4마리가 있었는데 말을 타고 부리는 것이 사람과 같고 몸뚱이가 큰 고양이를 닮았다. 낙타ㆍ생노루ㆍ3희생과 잡물 등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3700
COMMENT
•
1751 택리지(擇里志) - 1826 이전 무명자집(無名子集)
1597년에 왜적이 양원을 남원에서 격파하고 전주를 거쳐 공주로 북상할 때,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에 당도하였다. 연광정에서 한창 저녁밥을 먹는 도중에 비마의 급보가 이르자, 양호는 즉시 말에 올라 평양으로부터 한양에 이르는 칠백 리 길을 하루 낮 이틀 밤에 달려가, 달단의 장수 해생ㆍ나귀ㆍ새귀ㆍ양등산 등 네 명으로 하여금 철기 4천과 농원(弄猿) 수백 기를 거느리고 소사교(素沙橋) 아래에 매복하게 하였다.
3605
COMMENT
•
1751 택리지(擇里志) - 1826 이전 무명자집(無名子集)
왜적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백여 보 앞에 이르자 먼저 농원(弄猿)을 풀어놓으니 원숭이들은 말에 올라 채찍을 잡고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국에는 본래 원숭이가 없어 사람 같기도 하고 사람도 아닌 원숭이를 처음 보고는 모두 괴이한 마음이 들어 진군을 멈추고 멀거니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원숭이가 즉시 말에서 내려 진중으로 돌입하니 왜적들이 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원숭이가 몸을 잘 피하여 온 진중을 꿰뚫고 지나가서 진영이 흐트러졌다.
3701
COMMENT
•
1796 양경리호치제문
發騎三千 삼천 기병 풀어다가
迎敵素沙 소사에서 적 맞으니
塘置一旗 깃대 하나 둑에 꽂고
黙察偃竪 묵묵히 적의 동정 살피어서
千里決勝 천리 밖의 승부 결단
如掌其覩 제 손바닥 금을 보듯
妖氛南天 적이 모인 남쪽 땅에
蝴蝶爲陣 나비 모양 진 만들고
輝鏡朝旭 아침 해가 떠오르며 거울처럼 빛나자
舞劍以進 칼 휘두르고 나아갔네
3632
COMMENT
•
1796 양경리호치제문
于時天兵 이에 천자의 군사
浴甲橋下 다리 밑서 철갑을 걸치고
弄猿三百 재빠른 삼백 기병
一時鞭馬 한꺼번에 말 채찍질
□□□□
悉殲蹄間 말굽 아래 무찔렀으니
-- 고전번역원은 弄猿을 재빠른 기병으로 해석하였다.
3633
COMMENT
•
2018-09-07 안대회의 논문
원숭이 부대의 이야기를 기록한 택리지가, 원숭이 부대가 활동했다는 소사 전투가 일어나고 150여년 뒤에 편찬된 서적이라 신빙성에 의문이 있어 왔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도 명군이 원숭이 몇 마리를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확인됨으로써, 원숭이 부대가 실재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 임진왜란 전에 명나라 척계광이 원숭이 부대를 운용했었다는 기록과 후대에 그려진 세전서화첩에 원숭이 그림이 나오는 것이 덧붙여졌다.
5303
COMMENT
•
2018-09-07 안대회에 반론
원숭이 부대에 대한 기록이 중국 측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안대회는 해귀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지만 중국 측에 없는 것처럼 원숭이 부대도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일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해귀와 원숭이 부대는 비중이 전혀 다르다. 해귀는 전과가 없고 원숭이 부대는 전과가 있다. 또 규모가 크기 때문에 운용에도 적잖은 부담이 가는 부대다. 그 존재가 사실이라면 중국 측의 기록에도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되지 않을 수 없다.
2588
COMMENT
•
✓ 원숭이 부대 이야기 평가
원숭이 부대에 관한 기록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번째는 양호가 소사 전투에서 수백 기의 원숭이 기병을 투입했다는 이야기고, 두번째는 유정의 부대에서 전투에 활용될 수 있는 원숭이 몇 마리를 보았다는 이야기며, 세번째는 철수하는 명나라 군대를 환송하는 행사에 300마리의 원숭이 부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각각 1597년, 1598년 그리고 1599년의 일이다.
원숭이에 대한 표현도 각각 농원(弄猿), 초원(楚猿), 원병(猿兵) 등으로 조금 ...
2362
COM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