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676 新羅 > (6) 종족에서 민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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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고려사절요
옛날 우리 시조가 후손에게 경계하기를, '모든 천한 족속은 그 씨가 다른 것이니, 부디 이 족속들이 양민으로 되지 못하게 하라. 만일 양민으로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뒤에 반드시 벼슬에 나오게 되어, 차츰 중요한 자리를 구해서 나라를 어지럽게 할 것이니, 만일 이 경계를 어기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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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4.30 선조실록
새벽에 상(선조)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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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4.30(<-14) 선조수정실록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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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1 선조수정실록
상이 동파관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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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1 선조수정실록 전라도
이광이 먼저 경내에 이르러 군사를 모으니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전장에 나아가기를 기피하여 옥과·순창의 군인이 먼저 난을 일으켰는데 형대원·조인이란 자가 괴수가 되어 蘆嶺에서 막고 버티다가 얼마 뒤에는 도로 순창군에 들어가 관사와 형옥을 불지르고 노략질하였다. 군수 김예국이 빠져나와 이광에게 달려가 보고하니 이광이 병사에게 명을 전하여 토벌해서 주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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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1 선조수정실록 전라도
담양 부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떠났는데 길에서 난병을 만나 담양의 군사들도 흩어졌으며, 남원·구례·순천의 군사들도 삼례역에 도착했다가 일시에 저절로 흩어졌다. 이광이 고부 군수 왕경조를 시켜 퇴각하는 군사를 참하도록 하자, 군인들이 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왔는데 경조가 도망하여 면하였다. 남원 부사 윤안성과 구례 현감 조사겸이 모두 본읍으로 달려 돌아와 군사를 불러모아 거느리고 공주로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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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1 선조실록
저녁에 개성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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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3 선조실록
적이 경성을 함락시키니 도검찰사 이양원,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신각이 모두 달아났다. 이때 궁궐은 모두 불탔으므로 왜적 대장 평수가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경동하여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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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3이후 선조수정실록
적이 종묘를 불태웠다. 적이 처음 도성에 침입했을 때 궁궐은 모두 타버리고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가 그 곳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고 따르던 졸개 중에 갑자기 죽는 자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곳은 조선의 종묘로서 신령이 있는 곳이다.’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남별궁)에 이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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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04 선조실록
상이 하문하기를,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 (賊兵幾何 半是我國人云 然耶)"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그 말의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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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5.14 선조실록
모여 있던 장수들의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 라고 하였고, 싸우러 가던 병사들도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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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07.01 선조수정실록
왜장 청정이 북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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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0.01 선조수정실록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맨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를 처벌하게 하니, 회령의 유생 신세준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의 목을 베었으며,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고 반민들은 주벌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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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5.12 형평사 발기회
경남 진주에서는 이왕제도(이씨조선의 제도)에서 백정이라하여 차별대우를 받던 이들이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고 남과 같은 대우를 받겠다는 취지로 형평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함은 본보에 이미 소개한 바이거니와 오는 13일에는 동사 발기회를 진주좌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부근 각 군에도 권유문을 돌렸는데 대구부에서도 명치정에 있는 우피상(소가죽 상인) 김경삼 외 몇 사람의 발기로 지부를 설치하였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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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5.20 형평운동에 불평
그후 칠년만에 갑오경장이 시작될 때에 칠반천역의 면천입적하라시는 조서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삼십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의연히 해방이 실현되지 못하고 심지어 민적에까지 '도한'등 문자를 써두어 자식을 입학시킬 수가 없고 영원히 사람대우를 받지 못할 지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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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pedia: 노비
봉건시대의 최하층 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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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미록
임진왜란 때 한 의병장이 남긴 기록 중에 '쇄미록'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보면 이런 한탄이 나옵니다.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저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안 모이고, 일본군 환영해서 걱정이라는 것이지요. 그 때 일본군 점령정책이 동네마다 쌀 나눠주고 먹을 것 나눠주는 것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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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시대의 양반과 노비 - 이영훈
신라와 왕고 때는 노비의 비율이 10% 이하였으나 이조 전반기에는 40%를 넘게 된다. 이는 세종때 실시된 종천제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종천제는 부모의 어느 한쪽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된다는 법이다. 노비는 입역 노비와 납공 노비로 나뉘어지는데 납공 노비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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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백정출신 제중원 의사 박서양
백정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회적 천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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