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것이라 주장되는 출처 불명의 벽비와 갈석은 모두 흙판에 글을 새기고 구워 만든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만들기 쉽다. 토지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데, 날조된 것으로 판단한 까닭인지 전시를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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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 고려 건국 설화
騶(한서,후한서)┆騊(삼국지)┆鄒牟(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명,삼국사기)┆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고을덕묘지명,천남산묘지명,통전,古記,삼국사기)┆仲牟(일본서기)┆都慕(속일본기)┆中牟(안승 책문)┆衆解(삼국사기)┆東明(삼국사기)
▐ 고구려 벽비에는 鄒牟王이 세 차례 언급되는데 鄒牟란 표기는 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명 그리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23592#2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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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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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 덕흥리 진묘 묵서명
□□郡 信都縣 都鄕 [中]甘里 사람이며 釋迦文佛의 弟子인 □□氏 鎭은 역임한 관직이 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龍驤將軍·遼東太守·使持節·東夷校尉·幽州刺史이었다. 鎭은 77세로 죽어, 永樂 18年 戊申年 초하루가 辛酉日인 12월 25일 乙酉日에 완성해서 靈柩를 옮겼다.
▐ 벽걸이 墓誌는 묵서명에서 발상을 얻은 듯하다.
23592#2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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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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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05 武寧王陵誌石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厝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가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 고구려 벽비 날조의 모형이 이 무령왕릉지석인 듯하다. 줄이 그어져 있고 구멍도 있다. 그러나 재질은 돌이고 하나 있는 구멍은 돈꾸러미를 꿰기 위한 것이라는 학설이 초근에 나왔다.
23592#23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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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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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川王 壁碑 1
魏明帝 靑龍癸丑二(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詔峴睍宮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愼冊廣欲答 煙雲丘壑 扶筇登蟦 (邡?)外其所於水山深間 生愛月摩詰道 形今溯坐我士 頗得城郭根引七家 因相傳諸譜間 意不可自秘 引世出再(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茂?體筆 流芳益黠倫 叱(以)啓傹怢陵芥 王幸 安次三塞 始獲習元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於相 百三十三歷輯宗 渲引之叱(以)公世天地 蹈事師之風 須萬前郞衆 始異焉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
23592#23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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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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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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遂成王 遷都敎書 八稜碣石 2
▐ 벽비에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이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遂成과 王十年도 붙여서 遂成王十年으로 읽는다. 155년이다.┆明帝는 벽비에 나오는 魏明帝(204~239)로 판단한다.┆継明帝逐多□寧東百殊司吏玄菟定邑都沸流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는 벽비에 나오는 繼明帝還護東百殊司吏邑都沸流安泰久歲禮幣世高麗과 비교하여 □를 護로 판단한다.
23592#2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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