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솔까 이야기 > 1896 김구 치하포 사건

치하포 사건은 1896년 치하포에서 일본인 토전양량(土田讓亮 つちだじょうりょう)이 살해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의 주요한 논쟁이 있다. (1) 김구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이 일본군 육군중위인지 민간 상인인지? (2) 김구가 그를 일본군 첩자로 인식하고 살해했는지 아니면 일본 민간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살해했는지?
 
1896-03-09 고종시대사
강서군을 습격했던 의병대장 김창수(김구) 등이 대동강 하류 치하포(시하포)에서 일본인 육군중위 토전양량(つちだじょうりょう)을 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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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3-31 고종시대사
앞서 지난 3月 9日에 金昌洙(金九)가 大洞江 下流 治下浦(䲭河浦)에서 日本人 陸軍中尉 土田讓亮을 殺害하였었던 바 이 날 日本辨理公使 小村壽太郞이 外部大臣 李完用에게 照會하여 즉시 加害者를 拿捕하여 處罰할 것을 要求하다. 李完用이 照覆하여 該犯을 刻期 詗捕하여 按律 懲辦할 것임을 回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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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3-31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장기현 평민 토전양량이라는 자가 조선인 1명(평안도 용강 거주 임학길, 20세)을 데리고 황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진남포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도중에 황주 십이포에서 한국 배 1척을 세내어 대동강을 내려가다 3월 8일 밤 치하포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9일 오전 3시경 그 곳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 곳 숙박업자 이화보 집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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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3-31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다시 귀선하려 할 때에, 그 집 뜰 앞에서 그 여인숙에서 숙박한 한인 4, 5명에게 타살되었습니다. 고용된 한인 임학길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였지만 간신히 위험을 피하여 같은 달 12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그 곳 주재 평원경부에게 위와 같은 사건 전말을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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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4-20 고종시대사
日本公使 小村壽太郞이 外部大臣 李完用에게 致函하여 萬石洞 地段의 暫禁을 解除할 것과 鴟河浦 日本人 殺害犯의 逮捕 處罰에 關한 件을 促求하다. 李完用이 函覆하여 萬石洞 地段件은 該府 觀察使에게 解禁을 訓飭하여 地契를 發給하므로써 賣買를 便케 할 것이며 鴟河浦件은 이미 電信으로서 深査하여 報告할 것을 訓飭하였다고 回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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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5-01 각사등록 근대편
蛭子音三郞의 피해와 관련된 범인 체포의 어려움과 일본인이 실었던 물품 현황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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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5-30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조선인에 의해 피살된 일본인 43명 중 29명에 대해서는 조선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하며 1명당 5,000원의 보상금을 요구하고 있다. 이 29명의 명단에는 토전양량(土田讓亮)이 매약상(賣藥商)으로 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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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6-21 고종시대사
建陽 元年 6月 21日(日) 앞서 지난 3月 9日에 大洞江 下流 鴟河浦에서 日本陸軍 中尉 土田讓亮을 殺害한 金昌洙(金九)가 이 날 自家에서 逮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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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7-12 각사등록 근대편
안악군 치하포에서 김창수(김구) 외 2인의 일본인 살해에 관한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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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8-31 고경문서
점막(店幕 나그네에게 잠자리나 밥을 제공하는 집)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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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8-31 고경문서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 함께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수)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 세 차례에 걸쳐 김구를 취조한 기록이다. 살해당한 토전양량이 일본군이었다는 언급은 이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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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09-22 독립신문
9월 16일 인천 감리 이재정씨가 법부에 보고하였는데 해주 김창수가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장사 토전양량을 때려 죽여 강물 속에 던지고 환도와 은전 많이 뺏었기로 잡아서 공초를 받아 올리니 재판하여 달라고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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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1-07 독립신문
그전 인천 재판소에서 잡은 강도 김창수는 자칭 '좌통영'이라 하고 일본 상인 토전량양을 때려 죽여 강에 던지고 재물을 약탈한 죄로 교에 처하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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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백범일지
이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 소지품에 의하여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이란 자요, 엽전 600냥이 짐에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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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07-29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계림장업단은 지난 1896년 5월 仁川에서 조직되어 그해 8월에 이르러 지부를 京城, 釜山, 元山에 설치하였음. 현재 본부에는 부단장 1명, 이사 1명 외에 서기 1명이 있어서 실제 단무에 종사하고 있음. 지방의 大區에서는 區長 1명이 모든 일을 취급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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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8-13 도진순 교수 백범일지 교정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1895년 백범이 살해한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가 아니라 상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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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 도진순 논문
1895~96년 金九의 聯中 義兵活動과 치하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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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한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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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섭
2003년 11월 그는 시민들에게 배포한 문건을 통해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 김구를 모독했다는 네티즌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198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를 인용해 김구가 치하포에서 타살한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이라고 밝혀졌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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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2004년 7월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당시 정현태 검사는 김씨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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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사료관 개관 25주년 기고 최서면
명성황후 암살사건의 복수로 김구에 의해 살해된 土田讓亮의 기록은 鷄林獎業團이라는 회사의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외교사료관 소장사료의 폭과 무게에 더더욱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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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미군철수 자주화
김구는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군사적 기여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민족의 주권이 온전히 회복될지 염려하였다. 김구가 지금 살아 있다면 미군이 주둔하는 상태에서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 역시 온전한 민족 통일이 되지 못할 것을 염려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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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포 사건
토전양량이 일본군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지금까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6-05-30)에는 토전양량이 매약상(賣藥商)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이 기록에는 조선인에 의해 살해된 43명의 일본인 중에서 전신공, 군속(軍屬), 측량반원을 제외한 29명에 대해 조선정부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데, 토전양량은 이 29명에 포함되어 있다. 1997년 도진순 교수는 토전양량이 계림장업단(鷄林獎業團) 소속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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