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전팔번신사의 인물화상경에는 '계미년에 斯麻가 男弟王의 장수를 기원하며 거울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귀가 있다.
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계미년도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 들어 있다.
503년 계미년으로부터 4년 뒤 무열천황이 죽자, 지방에 있던 男大迹王이 男大迹天皇으로 추대된다.
男大迹天皇은 백제에게 임나 四縣을 주었고, 己汶을 놓고 백제와 가라가 대립하였을 때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또 가라의 多沙津을 떼어 백제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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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日本書紀(720)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백제왕이 말하기를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8194#25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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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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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日本書紀(720)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 다른 이름은 彦太尊이다)은 예전천황(譽田天皇)의 5세손 이며, 언주인왕(彦主人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원(振媛)이라고 한다. 진원은 활목천황(活目天皇)의 7세손이다. 천황의 아버지는 진원의 용모가 단정하고 아주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근강국(近江國) 고도군(高嶋郡) 삼미(三尾)의 별장에 사람을 보내어, 삼국(三國)의 판중정(坂中井)으로부터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비는 천황을 낳았으나, 천황이 아직 어릴 때 부왕(父王)이 죽었다.
8194#40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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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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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日本書紀(720)
진원이 탄식하여 “내가 지금 고향을 멀리 떠나 있으니 어찌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고향(高向 고향은 越前國의 읍명이다)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면서, 천황을 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성장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예우하였으며, 마음이 관대하였다. 천황이 57세가 되던 (무열천황) 8년 겨울 12월 기해(8일)에 소박뢰천황(小泊瀨天皇)이 죽었다. 원래 자식이 없어서 후사가 끊어졌다.
8194#8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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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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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日本書紀(720)
대반금촌대련(大伴金村大連)이 의논하기를, “지금 자손이 없어서 후사를 이을 수 없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마음을 의지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화는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제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의 5세손인 왜언왕(倭彦王)이 단파국(丹波國) 상전군(桑田郡)에 계시니, 청컨대 의장(儀仗)을 갖추고 수레를 호위해, 나아가 맞아들여 왕으로 세웁시다.”라고 하였다. 대신과 대련 등이 모두 따르므로 계획대로 맞아들이기로 하였다.
8194#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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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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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己汶
백제는 513년에 가라가 점유하고 있던 기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왜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고 가라는 이에 반발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이 가라를 침공하였으나 패하였고 백제의 장수는 신라로부터 나아가 가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기문은 백제가 차지하였다.
8194#1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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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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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계체천황이 무령왕의 동생이다?
(1) 503년이면 무령왕이 왕위에 있을 때인데 동생은 왕으로 표기하고 스스로는 그냥 이름만 표기할 수 있나?
(2) 계체천황은 507년에 57세로 천황이 되었고 무령왕은 623년에 62세로 죽었는데, 누가 동생인가?
(3) 일본서기에 계체 천황은 응신 천황의 5세손으로 되어 있고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4) 계체 천황은 천황으로 추대되기 전에 男大迹王이라 불렸다. 그렇다면 男弟王은 동생이 아니라 男大迹王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 ...
8194#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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