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년에 조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은 현도에서 나와 비류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동천왕은 달아났고 관구검은 환도성을 파괴하였다.
245년에 재차 공격하자 동천왕은 옥저로 달아났고 현도태수 왕기가 그를 쫓아 숙신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247년에 동천왕은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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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6 三國史記(1145) 고구려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母虜掠 但以其地爲郡縣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였다.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 244년에 조위의 침공을 받았을 때 동천왕이 도주했다는 鴨渌原이 이곳으로 추정된다.
2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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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8 曹魏, 공손연 토벌
景初二年 太尉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238년에 태위 사마선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2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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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三國志(289) 夫餘
正始中 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 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 位居遣大加郊迎 供軍糧
240~249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태수 왕기를 부여에 파견하였다. 위거는 대가를 보내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4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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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三國志(289) 毌丘儉 01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梁音渴) 宮軍破走
고구려가 수차례 침입하고 반하자 244년에 검이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모든 길을 따라 토벌하였다. 구려왕 궁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를 거스러 올라와 량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궁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갔다.
15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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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三國志(289) 毌丘儉 03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臣松之案東夷傳 沛者 句驪國之官名) 宮不從其言 得來歎曰 立見此地將生蓬蒿 遂不食而死 舉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구려의 패자는 이름이 득래인데 궁에게 수차례 간하였으나 궁은 듣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이 땅에 장차 쑥이 자라는 걸 보게 되리라'며 굶어 죽었다. 검이 군사들에게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며 잡힌 그의 처자식은 풀어 주게 했다.
2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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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梁書(636)
정치 5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위궁(동천왕)을 공격하였다. 위궁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관구검의 군대를 역습하여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싸움에 져 달아나니, 검의 군대는 추격하여 현에 이르러 수레를 달아 매고 말을 묶어 환도산에 올라 그 나라의 왕도를 격파하고 1만여명을 목베어 죽이니, 위궁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1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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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 北史(659)
五年 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 討位宮 大戰於沸流 敗走 儉追至䚂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位宮單將妻息遠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위궁을 공격하여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전하여 달아나자, 검은 추격하여 현에 이르러, 수레를 달아 매고 말을 묶어 환도산으로 올라가 그 도성을 도륙하였다. 위궁은 홀로 그의 아내와 자식들만 데리고 멀리 도망하였다.
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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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毌丘儉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世語曰 頎字孔碩 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 頎之孫)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245년에 다시 정벌하니 궁은 매구(북옥저)로 도망갔다. 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쫓게 했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바위에 공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 새기기를 불내성이라 명명하였다. 죽이고 사로잡은 게 모두 8천여명이었다.
2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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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東夷傳
其後高句麗背叛 又遣偏師致討 窮追極遠 踰烏丸骨都 過沃沮 踐肅愼之庭 東臨大海 長老說有異面之人 近日之所出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또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쪽으로 대해에까지 이르렀다. 장로가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근처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4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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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沃沮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할 때 구려의 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옥저의 읍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급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궁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40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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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買溝
▐ 동천왕은 옥저와 북옥저를 거쳐 숙신에 이르는 경로로 도주하였고 북옥저를 置溝婁라 부르기도 했다고 하므로 買溝는 置溝婁의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10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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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수서(636)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옥저로 쫓겨 갔다.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중국·고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불내·한·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1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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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양서(636)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정치 6년에 검이 다시 공격하니 위궁(동천왕)은 겨우 제가만 이끌고 옥저로 달아났다. 검은 장군 왕기에게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 천여리를 지나 숙신의 남쪽 지경에까지 이르러 돌에 공을 새겨 기록하였다. 또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이라 명명하고 돌아왔다.
40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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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북사(659)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
정치 6년에 검이 다시 공격하니 위궁은 황급히 제가만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검은 장군 왕기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 천 여리를 횡단하여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하였다. 또 환도산을 깍아서 불내성이라 새겨두고 돌아왔다.
1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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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246-08) 三國史記(1145)
▐ 삼국사기에는 다른 사서와 달리 동천왕이 옥저까지만 도망갔다고 되어 있고 밀우, 유옥구 그리고 유유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으며 동천왕이 위군을 패퇴시켰다고까지 되어 있다.
전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 듯하다.
추모왕 피살 사건이나 우로왕 피살 사건처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
1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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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천왕의 도주로
맥고려는 244년과 245년 두 차례에 걸쳐 조위의 침공을 받았다. 동천왕은 두 차례 모두 달아났는데, 244년에 달아난 곳을 양서(636)에서는 遠竄(멀리 달아나다)라고만 되어 있고 삼국사기(1245)에는 奔鴨渌原(압록원으로 달아나다)라고 되어 있다. 245년에 달아난 곳은 삼국지(289)에 沃沮와 北沃沮로 되어 있고 수서(636)과 양서(636)에는 沃沮, 삼국사기(1145)에는 南沃沮라 되어 있다.
17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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❸ 奔鴨渌原
압록강 수원 쪽으로 달아났다.
▐ 지금의 허천강 유역은 압록원이란 표현에 어울린다.
17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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❹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왕은 남옥저 쪽으로 달아났다. 죽령에 이르러서는 군사들이 흩어져 거의 없었다.
▐ 훗날의 弓漢嶺은 허천강 유역과 옛 옥저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동천왕의 도주로에 나오는 竹嶺에는 弓漢嶺이 어울린다.
17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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❺ 奔沃沮
옥저로 달아났다.
▐ 길주는 길주명천지구대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고 농경에 적합한 평지가 비교적 넓어 고대에 정치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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毋丘儉紀功碑
正始三年高句驪反┆督七牙門討句驪五┆復遣寇六年五月旋┆討寇將軍巍烏丸單于┆威寇將軍都亭侯┆行裨將軍領
2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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