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676 新羅 > (3) 新羅민족의 형성

민족의 기원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최초로 만나게 되는 분기 또는 통합의 시점이다. 676년 이전에는 시간과 경로를 달리하는 여러 유민들이 들어와 반도는 다종족 상태였으나 676년에 신라로 통합된 이후에는 왕고와 이조로 이어지며 단일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676년이 민족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漢나라 시기에 漢族이 형성된 것을 생각할 때 신라 시기에 형성된 이 민족은 신라민족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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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crafts, tanks, missiles, ...
 
(4) 한국통일
한국의 개념¦한국통일
 
(5) 한국통일의 배경
0051 三國史記(1145)0053 三國史記(1145)0300.08 三國史記(1145)0371.10 三國史記(1145)0472 위서(554)0475 三國史記(1145)0475.09 三國史記(1145)0478 三國史記(1145)0554 三國史記(1145)0642 三國史記(1145)0642 三國史記(1145)0660 三國史記(1145)¦한국통일의 배경
 
(6) 한국통일의 의미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김씨조선 두 나라가 각각 남쪽과 북쪽에 건국되었다. 그리고 서로 간에 정통성 확보를 위한 역사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특히 고대사에 있어서 신라와 고려는 그 인상이 각각 한국과 김조로 대중들에게 비춰지게 되면서 한국은 신라정통을 주장하고 김조는 고려정통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신라의 한국통일을 ‘화랑정신으로 굳게 뭉친 신라가 온갖 고난을 헤치고 삼국으로 갈라져 있던 민족을 하나로 통일한 위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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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삼국통일인가?
당이 물러간 676년의 상황을 보면 신라의 북쪽 경계는 고려가 있을 때와 달라진 게 없다. 신라는 이후 조금씩 영토를 넓혀나가 762년에 이르러서야 대방을 자신의 영역으로 공고히 하였다. 고려에 속했던 맥, 예, 옥저 그리고 부여는 모두 발해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삼국통일이라 부를 수 없다. 게다가 삼국통일은 남북국시대와도 모순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발해는 고려를 계승할 수 없고 그러면 신라와 발해는 남북국으로 묶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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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삼한통일인가?
삼한은 원래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후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가 임나가 망하자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당이 물러간 676년의 상황은 첫번째와 두번째 의미의 삼한에 예의 일부가 포함된 정도였고 762년에 가서야 대방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 영역은 첫번째와 두번째 의미의 삼한보다는 크지만 세번째 의미의 삼한에는 크게 부족하다. 따라서 삼한통일이라는 말도 부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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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민족통일인가?
0004.09 三國史記(1145)0167.07 三國史記(1145)0167.08 三國史記(1145)0369.09 三國史記(1145)0552 북사(659)0562.09 三國史記(1145)0607.03 三國史記(1145)0608 三國史記(1145)0695 新羅촌락문서1960.10.29 김정일1960.10.29 김정일 교정2003 고등학교 교과서新羅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 박노자이재환의 오류 (unification & reunification)¦민족통일인가?
 
新羅민족의 형성
모든 민족은 조상이 같다. 그러나 무리들 사이에 이질감이 커지며 여러 민족으로 갈라졌다. 한편, 별개의 민족이 합쳐져 하나의 민족이 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민족의 기원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최초로 만나게 되는 분기 또는 통합의 시점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조인과 왕고인을 거쳐 신라인에 이른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인, 백제인, 예인, 임나인 등으로 갈라진다. 따라서 한민족의 형성은 신라의 한국통일에서 비롯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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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귀신 蓋蘇文
당고조는 624년에 고려 영류왕을 上柱國 遼東郡王 高麗王으로 책봉하였다. 개소문은 그런 영류왕을 642년에 살해하고 집권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와 대립하다 결국 망했다. 삼국유사(1281)에 수나라의 장수가 고려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개소문으로 태어났다는 설화가 나올 정도로 개소문은 고려 멸망의 원흉이었다. 당태종으로부터 641년에 柱國 帶方郡王 百濟王으로 책봉받은 의자왕도 643년에 개소문의 고려와 손을 잡는 바람에 당나라와 멀어지고 결국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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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문천 - 혈통과 민족은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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