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솔까역사 > 1392 이씨 왕조

왕씨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요동을 치라고 보낸 정벌군을 되돌려 왕을 쫓아내고 이씨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에 물어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뒤 왕씨 왕족을 멸족시켰다. 이후 명나라의 요구로 처녀를 바치기 시작했는데 그 처녀들이 순장당해도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일본이 쳐들어왔을 때는 민중들이 궁궐과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왕자들을 붙잡아 일본군에 바치기도 했다. 망할 때는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고 통치권을 넘긴 뒤 그 통치에 부역하였다.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1387~1388 위화도 회군
천산산맥 북쪽에 금의 함주가 있었다. 금을 멸망시킨 원은 왕고의 철령 북쪽에 있던 함주를 이와 혼동하여 인근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소속시켰다. 또 금의 함주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는데 쌍성총관부를 이 개원로에 소속시켰다. 원을 몰아낸 명은 원의 개원로에 속했던 철령 이북을 왕고로부터 돌려받아 철령위를 설치하고 새로 설치된 요동도사에 소속시키려 하였다. 왕고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했으나 정벌군 장수 이성계는 반란을 일으켰다.
23547#23549 SIBLINGS CHILDREN 23549
 
1393 화령(和寧)
화령은 왕고의 공민왕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되찾아 화령부로 개칭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의 영흥만 일대로 이성계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화령은 우리나라의 국호가 될 뻔했다. 한편, 명나라에 쫓겨난 몽골의 도읍도 화령이라 했다.
23547#2327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1394 왕씨멸족
23547#23550 SIBLINGS CHILDREN 23550
 
1406 고려공사삼일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은 '고려의 정책이 3일을 가지 못한다(高麗公事不過三日)'는 뜻인데 신중함과 꾸준함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말이다. 이씨조선의 초기부터 꾸준히 언급되어 왔고 지금도 '냄비근성'이란 표현으로 바뀌어 여전히 인용되고 있다. 2008년의 광우병 촛불시위는 양은냄비처럼 급하게 끓어올랐다가 급하게 식었다.
23547#2331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1408 태종 이방원의 처녀진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조선왕에게 말하여 잘난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뽑아 오라."는 영락제의 말을 전하자 태종 이방원은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씨조선 처녀진헌의 시작이었다.
23547#23555 SIBLINGS CHILDREN 23555
 
1419 대마도 정벌
이조 세종때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만 7천여 명의 병력과 두 달여 치의 식량을 200여 척의 배에 실어 보냈다. 대마도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모두 산으로 도망갔고 정벌군은 배에 머물며 일부를 내려보내 치게 했으나 패하여 돌아왔다. 대마도주가 항복하는 편지에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정벌군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보름만에 돌아왔다.
23547#2410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1424 세종대왕의 처녀진헌
영락제가 죽자 태종이 바친 처녀들은 순장을 당했다.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마루에 끌어 올려 작은 상 위에 서서 올가미에 머리를 넣게 하고 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달려 죽었다. 한씨가 죽을 때 "낭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 간다." 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상을 빼내므로 다른 처녀와 함께 죽었다. 한씨의 여동생도 얼굴이 예쁘다고 알려져 1428년에 진헌녀로 명나라에 보내졌다. 그녀는 시집갈 때 쓰려고 준비했던 침구를 다 찢어 버렸다.
23547#4909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1426 왕씨 왕조의 초상화 소각
1426 朝鮮王朝實錄1428 朝鮮王朝實錄1433 朝鮮王朝實錄
 
1427 세종대왕의 처녀진헌
처녀 7인이 떠나기 전, 중궁이 경회루로 불러 전별연을 베풀었다. 밤에 날씨가 맑고 고요한데 슬피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듣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7명의 처녀들이 떠나는 날, 근정전으로 들어와 교자에 나누어 들어갔다. 건춘문에서 길을 나서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아 울면서 보냈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종대왕은 "원통한 것은 이루 말할수 없으나 외국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영만 따를 뿐이다."고 했다.
23547#23556 SIBLINGS CHILDREN 23556
 
1429 고려장
이조 초기에 늙은 노인을 외따로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례가 지방에 있었는데, 세종은 이 풍조를 개탄하면서 왕씨고려의 구습인 것처럼 말했고, 이것이 훗날 고려장 이야기로 발전하였다.
23547#2620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1592 임진왜란
선조가 피난길에 오르자 병사들은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았구나,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하였고 백성들은 궁궐과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전라도에서는 순찰사가 군사를 모으려하자 난을 일으켜 관청과 감옥을 불질렀고 겨우 끌어모은 군사들도 도망가 버렸다. 함경도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령하고 군사를 모으러 온 두 왕자와 관리들을 붙잡아 일본군을 맞았다.
23547#24435 SIBLINGS CHILDREN 24435
 
1909 안중근과 이씨왕조
황태자가 직접 전보로 아뢰기를, “이토오 태사가 오늘 오전 9시에 하얼빈 역에 도착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니 듣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생각건대, 그와 같은 고약한 도당이 세계 형세에 어두워서 이따금 일본의 두터운 우의를 무시하려고 하다가 마침내는 전에 없던 변괴를 빚어냈으니 이는 바로 짐의 국가와 사직을 해치는 자이다." 하였다.
23547#2730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2009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한 고종,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순조 그리고 일본군 항공사령관을 지낸 영친왕이 빠져있고 만주군 중위였던 박정희가 들어가 있다.
23547#1775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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