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地理志 > -0108 樂浪郡 > 0196~0220 帶方郡 > 帶方 ↜ 帶方太守張撫夷

봉산 지탑리 토성의 인근에 있는 장무이묘에서 대방 태수라는 직함이 발견되어 이곳을 대방군의 치소로 판단한다. ❸ 이로써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대수는 서흥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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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朝鮮 䛁邯 增地 黏蟬 駟望 屯有 帶方(대방) 列口 長岑 海冥 昭明 提奚 含資 遂成 鏤方 渾彌 浿水 吞列┆東暆 蠶台 不而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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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 三國史記(1145)
비류는 마침내 그의 아우 온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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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漢書(82)
朝鮮 䛁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대방)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366
 
0019 三國史記(1145)
여름 4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浿帶之間)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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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23 위략(魏略 265?)
염사착(廉斯鑡)이 진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 그리하여 착(鑡)은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군(郡)에 연락을 하자, 군(郡)은 착(鑡)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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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後漢書(445)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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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서흥강
0082 @서흥강
황해도 봉산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의 묘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곳을 대방의 치소로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을 지나는 서흥강은 서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한서(82)의 帶水西至帶方入海라는 부분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나 재령평야가 2천년 전에 바다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될 수 있다.
14805
 
0082 한서
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 대수는 서쪽으로 흘러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15125
 
0204~0220 三國志(289)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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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 後漢書(445)
朝鮮 䛁邯 淇水 貪資 占蟬 遂城 増地 帶方(대방)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樂都
21005
 
0276 진서(648)
帶方(대방)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21012
 
0289 三國志(三國志)
從郡至倭循海岸水行曆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대방)군을 떠나 왜에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마한)을 지나 남쪽으로 간 뒤 다시 동쪽으로 7천여 리를 가면 북쪽 해안에 구야한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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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8 장무이묘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태봉리(현재 북한의 구령리)에 있는 대방군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벽돌방무덤. 명문에 의해 무덤의 주인공은 중국 하북성(河北省) 계주(薊州) 출신 대방태수 장무이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무덤의 축조는 무신년, 즉 서진(西晋) 무제(武帝) 태강9년(太康九年, 288)에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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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 수서(636)
鏤方 長岑 海冥 蓋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 樂浪 黏蟬 含資 渾彌 臨屯 候城 提奚 踏頓 肅慎 碣石 東暆 帶方(대방) 襄平 凡此衆軍 先奉廟略 駱驛引途 總集平壤
21038
 
0648 진서(晉書)
屯有渾彌遂城秦築長城之所起。 둔유, 혼미, 수성은 진(秦)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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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三國史記)
국내(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427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586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패수(浿水)는 곧 대동강(大同江)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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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四郡考 - 通典에도, “平壤城은 곧 漢의 낙랑군 王儉城이다.” 하였다. 지금 평양을 낙랑이라고 칭하니 그 유래가 오래다. 魏志에, “대방군에서 倭에 이르자면, 해안을 따라 韓國을 경유한다.” 하였다. 한국은 지금의 兩湖이니, 이에 의하면, 그 땅(대방군)이 漢水 이북 경기ㆍ황해 연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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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대수고(帶水考) - 대수는 아마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인 듯하다. ... 미추홀은 바로 지금의 인천(仁川)이기 때문에 혹은 한수가 대수일 것이라고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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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21 야쓰이 비망록
열차 타고 가다 우연히 발견한 대방태수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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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령
185
 
@장무이묘(張撫夷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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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탑리토성 @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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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명전(富貴銘塼)
황해남도(구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용문면(龍門面) 복우리(福隅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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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이묘(張撫夷墓)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구봉리(舊地名 : 미산면 오강동)에 위치한 전축분으로, 인근 주민들은 여러 명의 인골을 모아 장사를 지냈다는 의미로 ‘도총(都塚)’이라 부르며, 내부에서 ‘대방태수 장무이(帶方太守 張撫夷)’라고 적힌 명문전이 발견되어 ‘장무이묘’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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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탑리토성(智塔里土城)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지탑리(智塔里)에 있는 토성지. 토성내에서 한대(漢代)의 벽돌과 기와조각 등이 채집되었고, 토성부근에 수십기의 한식(漢式) 목곽분(木槨墳) 및 전축분(塼築墳)이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북쪽으로 약 4㎞ 지점인 봉산군 구룡리(九龍里)에서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이(張撫夷)의 묘가 발견됨에 따라 이 토성을 대방군치지로 추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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