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초기 왕계는 건국 설화와 함께 광개토왕릉비(414)와 위서(554)에서 처음 나타난다. 광개토왕릉비에는 鄒牟-儒留-大朱留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고 위서에는 朱蒙-閭達-如栗-莫來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1145)에는 東明-琉璃-大武神-閔中으로 되어 있다.
수서(636)와 북사(659)는 대체로 위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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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려의 시조는 동명이 아니다
고려의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衆解(삼국사기)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東明은 부여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부여의 시조다.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고려의 시조 鄒牟를 東明이라 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현재까지는 삼국사기가 오류의 시작인 셈이다.
4419#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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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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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추모왕 피살
왕망(8-23)의 초기에 있었던 중국과 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왕망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로 되어 있고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중국의 기록과 정황이 일치한다.
4419#5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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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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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閭達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자를 처음에는 여해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국왕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4419#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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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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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永樂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4419#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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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인들은 왕위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뀐 시기, 즉 계루부의 대표인 주몽이 소노부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37년 무렵에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하면서 그 이전 소노부 왕권이 통치하던 고구려의 역사를 배제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419#1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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