仇道와 于老 관련 기록의 이동에 따라 그들 기록들과 함께 묶여 있는 사건들도 이동한다.
그러면 신라의 초기 팽창 과정이 자연스럽게 나열된다. 금호강을 따라 내려가다 낙동강을 만나고, 거기서 다시 낙동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뒤, 다시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가 청주까지 팽창하던 백제와 만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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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6 三國史記(1145)
❶骨伐┆骨伐國王 아음부가 휘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으므로, 그에게 집과 토지를 하사하여 안치하고 골벌국 지역을 郡으로 하였다.
▐ 236 骨伐(영천) → 261- 達伐(대구) → 291 甘文(김천 于老) → 293- 沙伐(상주) → 303- 狗壤(괴산 仇道) → 305 召文(의성 仇道)
3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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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6 骨伐國
▐ 骨伐國은 지금의 영천에 있었다. 신라가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영천을 거쳐가야 한다. 따라서 236년 이전에 鷄立嶺路(156), 竹嶺(158), 召文國(185) 그리고 甘文國(231)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은 모두 이 236년 이후로 물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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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6+ 三國志(289)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 倭와 접한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伯濟國을 비롯한 54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 천 집인데 합하면 10여만 집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斯盧國을 비롯한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변한도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이어서 합하면 4~5만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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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1 ❷達伐
❷達伐┆達伐城을 쌓고 나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
▐ 236 骨伐(영천) ➔ 261- 達伐(대구) → 291 甘文(김천 于老) → 293- 沙伐(상주) → 303- 狗壤(괴산 仇道) → 305 召文(의성 仇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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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1 ❰❰¹ 0231 ❸甘文
伊湌 于老를 대장군에 임명하여 甘文國을 공격해 격파하고 그 땅을 郡으로 만들었다.
▐ 236 骨伐(영천) → 261- 達伐(대구) ➔ 291 甘文(김천 于老) → 293- 沙伐(상주) → 303- 狗壤(괴산 仇道) → 305 召文(의성 仇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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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3.02 ❹沙伐
沙道城을 고쳐 쌓고 沙伐州의 호민 80여 집을 이주시켰다.
▐ 236 骨伐(영천) → 261- 達伐(대구) → 291 甘文(김천 于老) ➔ 293- 沙伐(상주) → 303- 狗壤(괴산 仇道) → 305 召文(의성 仇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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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08 ❰❰⁵ -0006 圓山·錦峴
遣使馬韓 告遷都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295 308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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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7 三國史記(1145) 新羅
伊西古國이 金城을 공격해 왔다. 우리나라가 많은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하였다. 문득 신비한 병사들이 왔는데,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해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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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3.10 ❰❰⁴ 0063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백제 왕이 땅을 넓혀 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303 304.08 304.10 306 315 316
▐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만나는 최초의 사건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의 분쟁에 관한 기록은 모두 303년 이후로 물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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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 ❰❰² 0185 ❺召文
파진찬 仇道와 일길찬 仇須兮를 좌·우軍主로 임명하여 召文國을 공격하였다. 軍主라는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 236 骨伐(영천) → 261- 達伐(대구) → 291 甘文(김천 于老) → 293- 沙伐(상주) → 303- 狗壤(괴산 仇道) ➔ 305 召文(의성 仇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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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 ❰❰⁴ 0066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해 함락하고서 2백 인을 남겨 머물러 지키게 했으나, 얼마 안 가 이를 회복했다.
┆303 304.08 304.10➔306 315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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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08 ❰❰² 0190 三國誤記
母山城-拘壤-圎山郷-缶谷城-蛙山┆出兵襲新羅西境圎山郷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308 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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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08 圎山郷
▐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킬 때 圓山과 錦峴은 이듬해까지 항복하지 않은 적이 있다. 그 圓山은 圎山郷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 圎山郷은 신라의 서쪽 경계라고 했으므로 圓山은 대전이 어울린다.
이곳은 562년에 왜가 백제에서 신라를 공격할 때 출발한 哆唎에도 대응된다.
3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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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5.09 狗壤·拘壤·槐壤·槐谷
▐ 처음 백제는 娘子谷城을 차지하고 신라왕을 만나자고 했다가 이듬해에 신라의 蛙山城을 공격하고 그 이듬해에 狗壤城을 공격한 뒤 2년 뒤에 다시 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그 뒤 백제는 다시 신라의 母山城을 공격하고 이듬해에 拘壤을 공격했다가 2년 뒤 圎山郷에서 쳐들어가 缶谷城까지 가서 신라군을 蛙山까지 유인하여 대파한다.
그 이후에는 狗壤 또는 拘壤이 나타나지 않고 槐谷만 나타난다.
앞뒤 정황을 보았을 때 狗壤 또는 拘壤은 槐壤으로도 불린 槐谷인 듯하다.
3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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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太平御覽(977~983)
진서에 이르기를 382년에 신라국왕 누한이 사신 위두를 파견하여 미녀를 바쳤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는데 머리를 아름답게 늘어뜨린 사람이 많다. 길이는 한 장이나 된다.
부견이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말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하고 명칭이 바뀌었으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3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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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8 ❰❰² 0266 「三國誤記」
烽山-槐谷┆백제가 烽山城을 공격하자, 성주 직선이 용맹한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우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왕이 그 일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사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
┆304.07 304.08 375.09 375.10➔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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施彌知
▐ 상주에서 삼년산성에 이르는 길은 화령을 거친다. 김헌창의 난 때 등장하는 施彌知鎭은 그 경로에 있던 군사적 요충지일 가능성이 있다.
29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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