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地理志 > 1108 東北九城 > 雄州→海洋┆火串山┆火串嶺

ᐥ雄州는 지금의 吉州 남쪽에 있었다.ᐥ 왕고는 1107년에 동쪽으로 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으로 弓漢嶺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村에 吉州¹를 설치하였다가 1109년에 모두 돌려주었다. 250여년 후 왕고가 다시 이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는, 吉州²를 옛 雄州 북쪽에 설치하고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雄州의 위치가 잊혀졌고 훗날 洪原과 혼동하게 되었다.
 
 蓋馬大山·單單大領
蓋馬大山·單單大領
서해로 흘러가는 압록강·대동강 유역과 동해로 흘러가는 여러 강들의 유역을 가르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으로 그 동쪽과 서쪽의 문화권을 갈라 놓았다. 그 동쪽에는 沃沮와 濊가 있었는데, 沃沮의 서쪽 산줄기를 蓋馬大山이라 하고 濊의 서쪽 산줄기를 單單大領이라 한다. 군데군데 이 산줄기를 넘는 고개가 있었는데, 黃草嶺이 대표적이다. 한편, 동해안을 따라가는 길도 군데군데 작은 산줄기로 막혀서 그것을 넘는 고개가 있었는데, 磨雲嶺이 대표적이다.
23139 SHARED
 
1107 高麗史(1451)
윤관이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弓漢伊嶺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 최자호을 보내어 蒙羅骨嶺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 950칸을 짓고 英州라고 불렀으며,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불렀으며, 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福州라고 불렀으며, 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吉州라고 불렀다.
23011 SHARED
 
1107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7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몰아내고 경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 火串嶺까지 북쪽으로 弓漢嶺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蒙羅骨嶺까지를 우리 강토로 삼았다. 火串山 아래에 성곽 952간을 쌓고 이름을 雄州라 하고, 吳林金村에 774간을 쌓고 이름을 福州라고 하고, 蒙羅骨嶺 아래에 952간을 쌓고 이름을 英州라 하고, 弓漢村에 674간을 쌓고 이름을 吉州라고 하였는데, 吉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가 남쪽에 있다.
23012 SHARED
 
1108 高麗史(1451)
6성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鎭東軍 咸州대도독부고 두 번째는 安嶺軍 英州방어사며 세 번째는 寧海軍 雄州방어사고 네 번째는 吉州방어사다. 다섯 번째는 福州방어사고 여섯 번째는 公嶮鎭방어사다.
23010 SHARED
 
1108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8년에 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으로써 咸州대도독부사를 삼아서 비로소 英州·福州·雄州·吉州의 4주와 公險鎭에 방어사를 두었다.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咸州를 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를 두고, 英州를 安嶺軍이라 하고, 雄州를 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를 두고, 吉州·福州·宜州의 3주에는 각각 7천 호를 두었고, 公險鎭·通泰鎭·平戎鎭 3진에는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23253 SHARED
 
1108.04.02 高麗史(1451)
윤관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로, 오연총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 내시낭중 한교여를 보내 조서와 고신, 자주색으로 수를 놓은 안장과 구마 2필을 가지고 雄州에 이르러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3150 SHARED
 
1108.04.08 高麗史(1451)
여진이 목책을 설치하고 雄州城을 포위하였다.
23156 SHARED
 
1108.04.23 高麗史(1451)
병마부원수 오연총에게 부월을 주고 가서 雄州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 6성을 설치할 때, 雄州에는 성랑 992간을 짓고 병민 1,436정호를 두었고 吉州에는 성랑 670간을 짓고 병민 680정호를 두었으므로, 吉州보다 雄州가 더 큰 규모였다. 또 동쪽끝인 火串嶺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雄州는 9성을 설치한 후 가장 먼저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
23159 SHARED
 
1108┆靑邱圖 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1834)
▐ 雄州가 나타나는 드문 지도다. 그러나 이 지도의 雄州는 吉州에 가깝다는 조건 외에 雄州가 가져야 할 다른 여러 조건들은 만족시키지 못한다.
23133 SHARED
 
1109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9년에 동계의 崇寧鎭·通泰鎭·眞陽鎭의 3진과 英州·福州의 두 주성을 철폐하고 또 咸州·雄州 2주와 宣化鎭의 성을 철폐하였다.
23254 SHARED
 
1109.02 高麗史(1451)
이여림을 遼에 보내 東界에 9성을 신축한 것을 알리고 반서대 1개를 보냈다.
23292 SHARED
 
1109~1258
1109~1258
금나라 시기에는 1109년에 형성된 경계가 유지되었을 듯하다.
23258 SHARED
 
1111 世宗實錄地理志(1454)
中城을 吉州에 쌓고 山城을 公險鎭에 쌓았다. ▐ 이 기록은 정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오기로 판단한다.
23255 SHARED
 
1330±
1330±
1258~1356에 원나라가 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鐵嶺 이북을 차지하였다
23381 SHARED
 
1330± 析津志輯佚
木吉 (百一十) 迭甫 (百四十) 阿剌可失列 (百四十) 瑞州 (百二十) 青州 (百一十) 洪寬 (百二十) 合懶府(高麗後門其東海) ▐ 洪原을 洪寬이라 했다.
23377 SHARED
 
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3260 SHARED
 
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3261 SHARED
 
1388 王高 禑王 表
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朴宜中 表請曰 명에서 철령위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였다.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는데,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23262 SHARED
 
1390 高麗史(1451)
1390년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23257 SHARED
 
1390.02.06 高麗史(1451)
밀직부사 王可仁을 遼陽으로 돌려보냈다. 왕가인은 海洋副千戶 王萬僧의 아들인데, 都司에서 공문을 보내어 보내달라고 하였으므로 돌려보냈다.
23403 SHARED
 
1390~1393 世宗實錄地理志(1454)
1390년에 雄州·吉州 등처에 管軍民萬戶府를 두었다가 1393년에 吉州牧으로 고쳤다.
23256 SHARED
 
1395 太祖實錄(1413)
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洪肯猛安 괄아아올난
23408 SHARED
 
1404.04 太宗實錄(1431)
영춘추관사 하윤·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사고를 열고 전조의 예종실록에서 예종조 시중 윤관이 동여진을 치고 변경에다 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황제가 왕가인을 여진에 보내어 建州衛를 설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에 의거하여 대답하려고 함이었다.
23263 SHARED
 
1404.04.04 太宗實錄(1431)
遼東천호 왕가인이 받들고 온 칙서에 "지금 參散·禿魯兀 등 11처의 溪關만호 寗馬哈, 參散천호 李亦里不花, 禿魯兀천호 佟參哈·佟阿蘆, 洪肯천호 王兀難, 哈蘭천호 朱蹯失馬, 大伸천호 高難, 都夫失里천호 金火失帖木, 海童천호 童貴洞, 阿沙천호 朱引忽, 斡合천호 劉薛列, 阿都歌천호 崔咬納·崔完者를 초유한다." 하였다. ▐ 溪關┆參散(英州)┆禿魯兀(端州)┆洪肯┆哈蘭(咸州)┆大伸┆都夫失里┆海童┆阿沙┆斡合┆阿都歌
23251 SHARED
 
1404.05.19 李朝 太宗 奏
遣計稟使藝文館提學金瞻如京師 瞻與可仁偕行 奏本云 계품사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경사에 가게 하였는데, 첨이 왕가인과 함께 갔다. 주본은 이러하였다.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을 거치는데,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23264 SHARED
 
1404.05.19 李朝 太宗 奏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吉州를 海陽이라 칭하고, 端州를 禿魯兀이라 칭하고, 英州를 參散이라 칭하고, 雄州를 洪肯이라 칭하고, 咸州를 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 雄州가 지명에서 사라진 것은 1393년에 雄吉州등처관군민만호부가 吉州牧으로 바뀌면서부터다. 10여년 밖에 안 지났지만 이때부터 洪原과 혼동이 일어났다.
23136 SHARED
 
1413 世宗實錄地理志(1454) 定平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23265 SHARED
 
1451 高麗史 吉州
吉州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弓漢村이라 불렀다. 1108년에 주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11년에 中城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海洋(三海陽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 1111년에 중성을 쌓았다는 부분은 당시 정황과 맞지 않아 착오인 듯하다. 또 吉州가 海洋이라 불린 게 아니라 雄州가 海洋이라 불렸는데, 훗날 그곳에 吉州가 설치되면서 착오가 생긴 듯하다
23250 SHARED
 
1451 高麗史 雄州
雄州는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防禦使를 두었고 寧海軍이라 불렀다. 1109년에 성을 철수하고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吉州에 합병하였다.
22972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예전에는 치소가 西之委에 있었으나 지금은 夫瑞坪 남쪽으로 옮겼는데 옛 치소와의 거리가 40리이다. 長德山이 주의 동쪽에 있다. 浮瑞川이 주의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78리, 서쪽으로 白頭山의 내맥인 大山에 이르기 90리인데 甲山과 접경이 되며, 남쪽으로 端川 磨天嶺에 이르기 91리, 북쪽으로 鏡城 雲加委의 大川에 이르기 89리이다. 驛이 5인데 雄平은 1422년에 두었다. 사철이 주의 동남쪽 40리 되는 多信浦項의 바닷가에서 난다.
23247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 西之委에 있었던 吉州를 吉州¹로 표기하고 훗날 夫瑞坪 남쪽에 설치한 吉州를 吉州²로 표기하기로 한다.
23428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① 雄州
▐ 雄州란 명칭은 1393년에 雄吉州만호부를 吉州牧으로 바꾸며 사라졌다. 30여년 후 1422년에 吉州 남쪽에 雄平驛이 만들어지는데, 이 雄平驛이 옛 雄州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390년에 雄吉州만호부를 설치할 때 吉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吉州와 雄平驛의 위치 관계가 그 묘사와 같기 때문이다.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친 사례를 볼 때, 雄州가 雄平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23231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② 火串山
▐ 雄平驛이 옛 雄州라면 雄州 위에 있었다는 火串山은 長德山이 된다.
23267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③ 火串嶺
▐ 雄平驛이 옛 雄州라면 雄州 위에 있었다는 火串嶺은 地境峴이 된다.
23244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④ 弓漢嶺
▐ 왕고가 1107년에 차지한 영토는 동으로는 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弓漢嶺에 이르는데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村에 吉州¹를 설치했다고 하므로, 弓漢嶺과 弓漢村은 雄州의 서북쪽에 있었다. 압록강 유역에서 雄州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起雲嶺을 넘어야 하는데, 이 起雲嶺이 弓漢嶺의 조건에 부합한다. 起雲嶺을 넘어 浮瑞川을 따라 내려오다 吉州²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이르면, 그곳이 바로 초기에 吉州¹를 설치했던 弓漢村이리라.
23114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⑤ 弓漢嶺
▐ 弓漢嶺은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통로였다.
23429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⑥
多信浦
23266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⑦ 弓漢村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⑦ 弓漢村
▐ 夫瑞坪 남쪽에서 多信浦項 바닷가까지의 거리만큼 서북쪽으로 浮瑞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이 吉州가 처음 있던 西之委다. 그리고 夫瑞坪 남쪽에서 多信浦項 바닷가까지의 거리를 40리로 설정하면, 吉州²에서 豆里山까지 거리가 88리가 되므로, 이 산이 吉州²에서 90리 떨어져 있고 甲山과 접경에 있다는 大山이 된다. @다신포항(多信浦項) @부서천(浮瑞川) @두리산(豆里山) @궁한촌(弓漢村)
22968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⑧
@두리산 @豆里山 @개마대산
23433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⑨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⑨
▐ 吉州² 위의 들판이 夫瑞坪이고 그 서쪽에 흘러내리는 강이 浮瑞川이다. 吉州² 동쪽에 있는 산이 長德山(←火串山)이고 그 북쪽을 넘어가는 고개가 地境峴(←火串嶺)이다. 그리고 吉州² 남쪽 長德山 아래가 雄州다. @부서평(夫瑞坪) @부서천(浮瑞川) @지경현(地境峴) @장덕산(長德山) @웅주(雄州) @화곶령(火串嶺) @화곶산(火串山)
23243 SHARED
 
1454 世宗實錄地理志 洪原
속현이 1이니 洪原이다. 예전에는 洪獻이라 일컬었는데, 遼陽志에는 紅坑이라 일컬었다. 1398년에 洪原縣으로 개칭하여 내속시켰다.
23135 SHARED
 
1530 新增東國輿地勝覽 洪原
古稱洪肯 或稱洪獻 옛날에는 홍긍 또는 홍헌이라고 일컬었다. ▐ 1108년에 설치되었던 雄州는 이듬해에 여진에게 반환되며 그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원나라 시기에는 海洋이라 불리었던 듯하다. 1390년에 海洋 인근에 吉州가 설치되어 海洋까지 관할하게 되면서, 雄州의 위치는 알기 어렵게 되었고 훗날 吉州가 海洋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착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5649 SHARED
 
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1530 新增東國輿地勝覽 洪原
▐ 1404년에 명나라가 洪肯의 천호 왕올란 등을 초유한다고 했을 때, 태종이 洪肯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윤관의 동북9성에 나오는 雄州를 끌어다 洪肯에 대응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洪原이 洪獻 또는 紅坑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되어 있어 명나라가 언급한 洪肯은 洪原이 맞는 듯하다. 그러나 그 洪肯이 雄州라는 태종의 주장은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기록에 나오는 정황과도 맞지 않는다.
23366 SHARED
 
1834 靑邱圖 吉州
22966 SHARED
 
1884
1884
23134 SHARED
 
1884 吉州
23137 SHARED
 
1884 明川
23138 SHARED
 
@길주(吉州)
23157 SHARED
 
高麗史(1451)
여진의 병사 수만 명이 와서 雄州를 포위하였다. 그 때 척준경이 성 안에 있었는데, 州守가 말하여 이르기를, “성을 지키는 것이 오래되어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밖에서 도움이 오지 않으니, 공이 성을 나가서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성 안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졸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척준경은 밤에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와서 定州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通泰鎭을 통과하고 也等浦에서 吉州까지 적을 만나 싸워 크게 패배시켰다.
23279 SHARED
 
¦公嶮鎭
1109년에 吉州가 포위당하자 오연총이 구원에 나섰는데 그 병력은 인근의 雄州에서 출발했을 듯하다. 雄州에서 吉州¹로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경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은 수백년 후 吉州²가 설치되어 남쪽의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된 곳이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
23183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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