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는 고려가 광개토왕때 모용선비의 남연에 사신을 보내 천리인 열 명과 천리마 한 필을 바쳤다고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천리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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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 沃沮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句麗)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貊)·포목·생선·소금·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6978#6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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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 十六國春秋(522)
▐ 말을 바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지에는 예가 한나라 환제(146~167) 때 과하마를 바쳤다고 되어 있고 고려가 말을 바친 기록은 406년과 408년에 남연에 이 천리마를 바친 것과 413년에 남조의 진나라에 자백마를 바친 것이 있다.
예나 고려 모두 유목 문화권이 아니고 기마 문화의 본산지인 중앙 아시아와는 거리가 멀다. 천리마란 엄청난 이름이 붙은 말이 고려에서 산출되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6978#6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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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高麗史(1451)
정중부는 해주 사람이다. 용모가 웅장하고 뛰어나며, 눈동자가 네모나고 이마가 넓었다. 살결이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신장이 7척이나 되어 그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처음에 주에서 군적에 이름을 올리고 그의 팔을 봉하여 개경으로 보내었다(封其臂送京). 재상 최홍재가 선군하다가 그를 보고 비범하게 여겨서, 봉한 팔을 풀어주고 위로하고 격려한 뒤 공학금군으로 충당하였다.
6978#26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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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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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亂中雜錄
釜山之賊 以葛莖貫倭人手掌 如我國封臂之狀
부산의 적이 칡 줄기를 가지고 왜인의 손바닥을 꿰어 우리나라의 封臂와 같이하여 差使라 칭하고 상도에 있는 적에게 보내어 내려오기를 재촉한 때문에 모든 적이 흘러내려 길에 가득 찼는데, 우도 각 고을 의병이 곳곳에 구름처럼 일어나서 진주·함양·거창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적을 쏘아대고 있다니 지금 이때에 무찔러 멸하지 못하면, 위로 임금의 수치를 씻고 아래로 백성이 살육된 것을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6978#26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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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里人의 정체에 대하여
천리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존재한다.
(1) 전령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을 천리마라 부르는 것과 같이 천리인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졌을 거라는 추측이다.
즉, 천리인은 걷거나 뛰어서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중요한 정보를 신속히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삼국지에 고려인의 걸음이 매우 빨랐다고 되어있는 것과 연결지어지기도 한다.
(2) 짐꾼
먼 거리로 무거운 짐을 나를 수 있는 짐꾼이라는 ...
6978#6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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報狀使
보장사는 고을을 오가며 공문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으레 가난한 아전을 보장사에 임명했는데, 춥고 굶주려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폭설이 내리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해도 단 하루라도 지체하면 벌을 받았다. 구례군의 보장사는 백성이 돌아가며 맡았는데 젊은 사람은 괜찮지만 노약자는 직접 갈 수가 없어 사람을 사서 보내야 했다. 1년에 서너 번은 차례가 돌아오니 재산을 탕진할 지경이었다.
6978#6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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擺撥
파발제는 원래 중국의 송나라 때 금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려고 설치한 군사첩보기관 ‘파발’에서 유래하였다. 전달방법에 따라 보체(步遞)·급각체(急脚遞)·마체(馬遞)로 구분되었다. 보체와 급각체는 사람이 뛰어 전달하는 것이며, 마체는 포졸이 말을 타고 전달하는 것으로 그 뒤 원·명대에 더욱 발달해 우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6978#6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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驛站
중국의 역전제도는 주왕조부터 제도화되었다. 왕실과 제후간의 봉건적 유대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긴밀한 군사통신조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서주(西周)시대에는 수레를 이용한 용거(用車)와 도보에 의한 전거(傳遽)제도가 있었다. 또한 사신 접대를 위한 관사(館舍)를 두어 일상의 평시 통신과 변방의 긴급한 정보를 전달하는 군사통신체제로 이원화하여 운영하였다.
6978#6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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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빠른 사노비
전남 나주에 살던 연산군 후궁의 오라비는 누이의 권세를 믿고 인근 고을의 수령들을 종 부리듯 했다. 그에게는 잘 달리는 노비가 셋이나 있었다. 나주에서 서울까지 740리(300km)를 하루 반나절 만에 주파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즉각 노비를 서울로 보내 누이에게 일러 바쳤다. 그를 거역한 수령은 며칠 못 가 파면당하곤 했다.
6978#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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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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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驛奴婢
驛奴婢는 역참에 소속된 노비로 立馬役·駄運役·雜役 등의 노역을 제공하였다. 조선 초기의 역노비는 그들이 담당하는 역역에 따라 크게 轉運奴婢 와 急走奴婢로 구분되었다. 전운노비는 역에서 사신의 卜物이나 進上·貢賦 등의 관수품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급주노비는 문서를 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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