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솔까역사 > 1932 이봉창의 불편한 진실

이봉창 의사는 민족해방을 위해 1932년 일본수괴(日本首魁 ひろひと)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한 사람이다. 그의 습격은 일본으로부터 불쾌한 통치를 받던 우리 민족에게 매우 통쾌한 일이나 이봉창이란 인물 자체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다.
 
 죽이려는 자와 조문하는 자
죽이려는 자와 조문하는 자
왼쪽 사진은 말을 타고 있는 히로히토이고 오른쪽 위 사진은 히로히토의 행렬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당한 이봉창이며 오른쪽 아래는 히로히토가 죽자 분향소에 가 조문하는 당시 대선 주자 김대중이다. 202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는 대선 주자들이 조문을 하지 않았는데, ᐥ일본 수괴는 조문하고 한국 대통령은 조문하지 않느냐ᐥ는 지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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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1.08 이봉창 신문조서
이름은 이봉창, 나이는 32세, 직업은 무직, 주거는 부정, 본적은 朝鮮 京城府 錦町 118번지, 출생지는 朝鮮 京城府 元町 2丁目 번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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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1.10 대불경사건돌발
일본수괴(日本首魁)의 행렬에 수류탄 비슷한 폭발물을 던졌으나 마차 바닥에 엄지손가락만한 손상만 여러 군데 났을 뿐 일본수괴(日本首魁)가 탄 마차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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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1.11 이봉창 신문조서
나는 의장병도 선도하고 있어 첫 번째 마차를 천황 폐하가 타고 계시는 마차라고 생각하여 봤더니 그 마차에는 한 사람이 타고 계셨는데 그 분은 천황 폐하와는 다른 분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 다음 즉 두 번째 마차의 뒤에 의장병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첫 번째가 아니라면 두 번째야말로 확실하게 천황 폐하가 타고 계시는 마차에 틀림없다고 순간적으로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폭탄을 끄집어내어 두 번째 마차를 겨냥하고 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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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1.12 이봉창 신문조서
나는 東京에 도착한 다음날인 12월 23일에 上海의 백정선에게 100圓을 송금해 달라고 전보를 쳤습니다. 그러나 회답도 오지 않는 데다 갖고 있는 돈도 조금밖에 남지 않아 尾張屋 여관에 머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괴로워서 딴 곳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神戶에서 헤어질 때 周福根이 자기 명함을 주면서 東京에 오면 놀러 오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尾張屋 여관을 나와 北蒲田 周福根을 찾아가 술 등을 대접받은 뒤 그 집을 나와 本所區 綠町 4丁目의 싸구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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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1.28 이봉창 신문조서
내가 어찌하여 검속됐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형사는 편지의 해석이 안 되어 시일이 걸렸다고 말하고 나에게 그 해석을 명령하기에 나는 바로 그것을 일본말로 번역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나는 수상한 자가 아니며 大阪의 모 경찰관도 알고 있다고 말하고 그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풀려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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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2.09 이봉창 신문조서
나는 山住와 마시고 돌아다니고 도박에 손을 대 1주일 사이에 돈을 남김없이 써 버리고 나니 尼ケ崎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져 大阪과 神戶에서 인부 노릇을 했습니다만 노동이 격심해 참지 못하고 함께 일하던 本間茂一의 도움으로 大阪市 東成區 鶴橋町北ノ町 비누상점 山野鹿之助 집에 취직이 됐습니다. 그곳에서 昭和 4(1929)년 2월 말경부터 그해 9월 말경까지 있었습니다만 수금한 매상금 100圓을 갖고 東京으로 도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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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2.12 이봉창 신문조서
내가 조선의 독립을 바라게 된 것은 차별 대우가 그 주된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일찍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京都 五條경찰서의 검속(1928년 11월 중 京都 五條경찰서에서 11일 동안 검속된 일)으로 말미암아 처음 조선의 독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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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2.13 이봉창 신문조서
백정선은 마침내 준비는 됐는데 언제 일본 내지에 가 주겠는가 라고 묻기에 나는 언제든지 좋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다면 오는 17일 神戶 직항의 배가 떠나므로 그 배로 가도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白은 그러냐고 하면서 중국 지폐로 300弗을 꺼내어 그것을 여비와 그밖에 내지에 갈 준비에 써 달라고 말하기에 나는 그 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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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3.11 이봉창 신문조서
白貞善은 이 사진의 남자인가? 그렇습니다. 이 사진의 남자가 백정선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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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6.27 이봉창 신문조서
나는 형무소에 수용된 후 불교 이야기를 듣거나 불교 책을 읽거나 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한 결과 나의 사상은 내가 사바 세계에 있을 때와 아주 다르게 변했습니다. 나는 金龜로부터 부추김을 받아 결국 그런 마음이 생겨 천황 폐하에 대해 난폭한 짓을 했습니다만 오늘에는 굳이 김구를 원망하지는 않으나 그 사람의 부추김에 놀아난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엄청난 짓을 해 참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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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9.09 이봉창 공판준비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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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9.16 이봉창 공판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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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9.18 대역범 이봉창 특별공판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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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9.30 이봉창 판결
피고인 이봉창을 사형에 처함. 법률에 비추어 피고인의 행위는 형법 제73조 前段 천황에 대해 위해를 가한 죄에 해당함과 함께 폭발물 단속 벌칙 제1조의 죄에 해당하는 것이나 형법 제54조에 의해 무거운 전자의 형으로 처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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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항일운동가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상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원이 되었다. 1932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 (櫻田門) 앞에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쇼와 부자를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미수로 적중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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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에 대한 난감한 기록
이봉창 의사는 한국독립을 위해 1932년 일본수괴(日本首魁 ひろひと)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한 사람이다. 김구선생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성품은 마치 봄바람과 같이 온화하면서도 의지가 굳고, 열정이 불꽃처럼 뜨거웠다. 이런 까닭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함에 있어서 인자함이 있으면서도, 의협심이 강하여 한번 노하면 두려움 없이 칼부림을 하고 1천만 명이라도 물리칠 듯한 기세였다. 술을 마심이 호걸이었으나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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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과 미군철수 자주화
이봉창은 민족차별에 대한 반감으로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봉창이 지금 살아있다면 미군이 주둔하는 데서 발생하는 모순도 참지 못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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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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