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고려(樂浪高麗)는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427년부터 패망한 668년까지를 말한다. 제사, 장례, 결혼 등의 풍습이 이전의 맥고려(貊高麗)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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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0316 진서(648) 平州
276년 10월에 창려, 요동, 현토, 대방, 낙랑 5군국을 갈라 평주를 설치하였다. 26현 18100호다.
평주(5군국,26현,18100호) - 창려군(창려,빈도), 요동국(양평,문,거취,낙취,안시,서안평,신창,역성), 낙랑군(조선,둔유,혼미,수성,누방,사망), 현토군(고구려,망평,고현), 대방군(대방,열구,남신,장잠,제해,함자,해명).
▶동수의 관직 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는 晋의 평주 5군국 중 4군을 포함한다.
2459#1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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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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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4↤ 진서(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秦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2459#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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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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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자치통감(1084)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350여년 전의 낙랑 목간에는 낙랑 인구의 14%인 4만여 명이 한족이었다. 1천여가는 5천에서 1만 정도의 인구이니, 이때 모용선비로 옮겨간 한족은 일부분이었다.
2459#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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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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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 위서(0554)
모용원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남쪽 길로 침입하여 목저에서 전투를 벌여 쇠(釗, 고국원왕)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丸都까지 침입하니 쇠는 혼자서 도망쳤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미천왕)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5만여명을 약탈하고 그의 궁실을 불살라 丸都城을 파괴한 뒤 귀환하였다.
2459#1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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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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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11 三國史記(1145)
(고려) 모용황이 스스로 굳센 병력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오고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 병력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도로 나와 침략해 왔다.
왕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 단웅곡으로 들어갔다. 장군 모여니가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갔다.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
2459#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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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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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8 장무이묘(張撫夷墓)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구봉리(舊地名 : 미산면 오강동)에 위치한 전축분으로, 인근 주민들은 여러 명의 인골을 모아 장사를 지냈다는 의미로 ‘도총(都塚)’이라 부르며, 내부에서 ‘대방태수 장무이(帶方太守 張撫夷)’라고 적힌 명문전이 발견되어 ‘장무이묘’라고도 한다.
▐ 동수묘의 묵서명에 나오는 護撫夷校尉를 떠올리게 한다.
2459#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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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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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5 三國史記(1145) 高句麗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征東大將軍은 2품이다.
자사는 주의 행정 장관인데 영주는 전연때 사용되지 않은 지명이어서 營州刺史가 허구의 관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公은 5등급 작위다.
2459#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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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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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7 樂浪 昌黎 玄菟 帶方
冬壽 -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
▐ 동수는 요동 사람이다. 낙랑, 창려, 현도 그리고 대방은 晋의 평주 5군국 중 요동을 제외한 4군이다. 낙랑과 대방은 고려가 병합했지만 그 나머지는 모용선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용선비는 낙랑과 대방의 유민도 받아 따로 낙랑군을 설치한 바 있다. 동수는 336년에 고려로 망명하였는데 이 관작은 그 전에 모용선비에 있을 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2459#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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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2459#10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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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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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기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광개토왕릉비를 만들 때에는 이미 중원의 신화와 전설이 고려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2459#14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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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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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낙랑 천도
고려는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자 이듬해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371년에 백제의 침공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자 다시 환도성으로 되돌아갔다. 고려는 광개토왕때 백제를 여러 차례 격파한 후에야 장수왕이 마침내 평양으로 도읍을 다시 옮길 수 있었다. 313년에 낙랑을 병합한 후 100여년만의 일이다.
2459#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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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삼국지(289)에는 신랑이 폐백을 바치고 신부의 집에서 동거하다 아들을 낳으면 가족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수서(636) 이후의 사서에는 연애를 자유로이 해서 남녀가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키는데, 이때 신랑이 폐백을 바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2459#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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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한(漢)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중원의 무덤벽화는 한(漢)의 쇠퇴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북중국과 요동에서는 오히려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고려의 벽화무덤은 현재까지 10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대동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압록강 중류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축조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연(燕)나라 출신 동수의 묘로 357년에 만들어졌고 옛 대방 지역에 위치해 있다.
2459#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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