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5. 고려는 우리 역사인가? > (4) 낙랑고려

낙랑고려(樂浪高麗)는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427년부터 패망한 668년까지를 말한다. 맥고려(貊高麗)와는 문화적으로 달랐다.
 
-0045 새로 발견된 樂浪木簡
조선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학술지 '력사과학'에 게재된 손영종의 논문에는 낙랑 총 인구의 14%인 4만 명이 漢族(한족)이며, 나머지 86%는 土着民(토착민)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한다.
10970
 
0265~0316 진(西晉)
10959
 
0265~0316 진서(648) 平州
276년 10월에 창려, 요동, 현토, 대방, 낙랑 5군국을 갈라 평주를 설치하였다. 26현 18100호다. 평주(5군국,26현,18100호) - 창려군(창려,빈도), 요동국(양평,문,거취,낙취,안시,서안평,신창,역성), 낙랑군(조선,둔유,혼미,수성,누방,사망), 현토군(고구려,망평,고현), 대방군(대방,열구,남신,장잠,제해,함자,해명).
10958
 
0290-0390 三韓의 재편
중국에서 서진이 망해가면서 요동과 한국은 재편되었다. 낙랑과 대방은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려에 병합되고 고려와 백제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고려는 기존의 한사군 잔존 세력과 전연으로부터 이탈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역을 다스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10933
 
0294↤ 진서(648)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秦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10957
 
0307± 모용선비
창려, 요동, 현도 등 서진의 평주는 일찌감치 모용선비의 차지가 되었고 뒤이어 유주를 포함한 하북 지역도 모용선비가 차지하게 된다.
10964
 
0313 자치통감(1084)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350여년 전의 낙랑 목간에는 낙랑 인구의 14%인 4만여 명이 한족이었다. 1천여가는 5천에서 1만 정도의 인구이니, 이때 모용선비로 옮겨간 한족은 일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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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삼국사기(1145)
현도성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고려는 낙랑과 대방은 차례로 병합했지만 현도는 차지하지 못했다.
10971
 
0315 현도와 고구려
현도군은 심양과 薩爾滸城(살이허성) 사이에 있었고 고구려현은 赫圖阿拉(혁도아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968
 
0317 백제의 요서점유 (X)
모용부가 요동을 차지하자 단부는 요서와 북평을 차지했다.
14772
 
0317~0420 진(東晉)
사마예(司馬睿)에 의해 강남에 세워진 진(西晉)의 망명 왕조이다.
10942
 
0317± 慕容鲜卑段氏鲜卑进入辽东和辽西
14774
 
0334-08 삼국사기(1145)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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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6
모용 선비는 모용황과 모용인으로 갈라졌다가 모용황이 승리하였다. 이때 모용인의 편에 섰던 동수가 고려로 망명하였다.
14778
 
0336 자치통감(1084)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동수(佟壽), 곽충(郭充), 적해(翟楷), 방감(龐鑒)은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유(幼)는 도중에 돌아왔고 황(皝)의 군사가 추급하여 적해, 방감은 베어죽이고, 동수, 곽충은 고려로 달아났다.
10956
 
0337~0370 연(前燕)
10960
 
0337~0370 연(前燕)
요서 일대에 살던 모용(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조(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업(鄴)으로 옮겼다. 370년 진(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10950
 
0342 삼국사기(1145)
가을 8월에 丸都城으로 옮겨 살았다.
10939
 
0342 위서(0554)
모용원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남쪽 길로 침입하여 목저에서 전투를 벌여 쇠(釗, 고국원왕)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승승장구하여 드디어 丸都까지 침입하니 쇠는 혼자서 도망쳤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미천왕)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5만여명을 약탈하고 그의 궁실을 불살라 丸都城을 파괴한 뒤 귀환하였다.
10940
 
0343-02 삼국사기(1145)
고국원왕이 그의 동생을 연(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내고 그 어머니는 아직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10944
 
0343-07 삼국사기(1145)
移居平壤東黄城 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옮겨 살았다.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다.
10946
 
0343-07 동명왕릉
10966
 
0348 帶方
張撫夷(張使君) - 帶方太守 ● 무이는 동수묘에 나오는 무이교위를 말하는 듯하다. 무이교위는 오환교위, 선비교위 그리고 동이교위처럼 변방의 종족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보인다.
10936
 
0348 장무이묘(張撫夷墓)
장무이묘의 대방태수라는 명문 때문에 이 지역이 한사군의 대방으로 추정된다.
10953
 
0350~0394 진(前秦)
10961
 
0350~0394 진(前秦)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은 오호십육국시대 초기에는 포홍을 지도자로 하여 전조(前趙) 및 후조(後趙)의 용병으로 각지를 전전하였다. 특히 후조에 의해 하북성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포홍의 아들 부건이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351년에 전진을 건국하였다. 전진은 370년에 전연을 멸망시켰다.
10951
 
0353 遼東 韓 玄菟
佟利 - 遼東韓玄菟太守 ▶동리는 336년에 고려로 망명해온 동수(佟壽 冬壽)와 어떤 관계일까? 두 사람은 이름 외에도 현도 태수라는 공통점이 있다.
10934
 
0355 營州 樂浪
前燕 - 故國原王 - 征東大將軍 營州刺史 樂浪公
10935
 
0357 樂浪 昌黎 玄菟 帶方
冬壽 -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 ▶동수는 요동 사람이다. 낙랑, 창려, 현도 그리고 대방은 晋의 평주 5군국 중 요동을 제외한 4군이다. 낙랑과 대방은 고려가 병합했지만 그 나머지는 모용선비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용선비는 낙랑과 대방의 유민도 받아 따로 낙랑군을 설치한 바 있다. 동수는 336년에 고려로 망명하였는데 이 관작은 그 전에 모용선비에 있을 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10932
 
0357 동수묘(冬壽墓)
이 지역은 한사군의 소명현이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소명에는 낙랑군의 남부도위 치소가 있었다. 고려는 평양성 외에도 이곳을 한성이라 하여 국내성과 함께 별도의 도읍지로 삼았다.
10954
 
0369-09 삼국사기(1145)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0947
 
0371-10 삼국사기(1145)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平壤城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故國之原)에 장사지냈다.
10948
 
0384~0407 연(後燕)
10963
 
0384~0407 연(後燕)
선비족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나라이다.
10952
 
0396 廣開土王陵碑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0965
 
0408 遼東 幽州
鎭 -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龍驤將軍 遼東太守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史 ▶鎭은 하북 사람이다. 요동과 유주는 전진과 후연이 번갈아가며 차지했었다. 따라서 요동태수나 유주자사는 전진 또는 후연에서 받은 관직일 것이다.
10937
 
0408 진묘(鎭墓)
10955
 
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하백은 황하에 산다는 신이다. 광개토왕릉비를 만들 때에는 이미 중원의 신화와 전설이 고려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14769
 
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기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광개토왕릉비를 만들 때에는 이미 중원의 신화와 전설이 고려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14771
 
0427 낙랑 천도
고려는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자 이듬해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371년에 백제의 침공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자 다시 환도성으로 되돌아갔다. 고려는 광개토왕때 백제를 여러 차례 격파한 후에야 장수왕이 마침내 평양으로 도읍을 다시 옮길 수 있었다. 313년에 낙랑을 병합한 후 100여년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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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삼국사기(1145)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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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삼국지(289)에는 신랑이 폐백을 바치고 신부의 집에서 동거하다 아들을 낳으면 가족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수서(636) 이후의 사서에는 연애를 자유로이 해서 남녀가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키는데, 이때 신랑이 폐백을 바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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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0289 삼국지   0445 후한서   0636 수서   0636 양서   0636 주서   0659 남사   0659 북사   0945 구당서   1060 신당서  
 
벽화
한(漢)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중원의 무덤벽화는 한(漢)의 쇠퇴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북중국과 요동에서는 오히려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고려의 벽화무덤은 현재까지 10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대동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압록강 중류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축조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연(燕)나라 출신 동수의 묘로 357년에 만들어졌고 옛 대방 지역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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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신, 쓰개, 머리털 등
무덤 벽화는 낙랑을 병합한 이후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덤 벽화에 나오는 복식은 모두 낙랑고려인의 복식이다. 그 이전 맥고려인의 복식은 잘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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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삼국지(289)에는 결혼 직후부터 수의를 준비하고 장례에 재물을 많이 쓰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변에 심는다고 되어 있다. 주서(636)에는 부모와 남편 상의 복제가 중국과 같다고 되어 있다.
2459#2514 COMMENT
 
제사
삼국지(289)에는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는데, 구당서(945)에 와서는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가한신(可汗神)·기자신(箕子神)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2459#2513 COMMENT
 
¦낙랑고려(樂浪高麗)
낙랑 천도를 전후해서 고려는 풍습, 문화 그리고 국호까지 바뀌었다. 그래서 낙랑 천도 이후의 고려에 낙랑고려(樂浪高麗)란 이름을 붙여본다. 고려가 망할 때 고려인 2만 8천호 또는 20만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는데,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주로 낙랑고려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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