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鄒牟 ②儒留 ③朱留 ④色朱 ⑤憂 ⑥宮 ⑦遂成 ⑧伯固 ⑨伊夷謨 ⑩位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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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려의 시조는 동명이 아니다
고려의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명),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衆解(삼국사기)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東明은 부여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부여의 시조다.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고려의 시조 鄒牟를 東明이라 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현재까지는 삼국사기가 오류의 시작인 셈이다.
4419#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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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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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추모왕 피살
왕망(8-23)의 초기에 있었던 중국과 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왕망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騶로 되어 있고 삼국지에는 고려왕 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延丕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중국의 기록과 정황이 일치한다.
4419#5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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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9~0392 襄·壤·原
國襄·故國川原·東襄·柴原·中壤·西壤·好壤·故國原·故國壤
▐ 왕이 죽으면 □川之原에 묻고 □川王 또는 □壤王이라고 했다. □에 들어가는 故國, 東, 中, 西 그리고 美는 모두 훈차다. □壤은 □川이 흐르는 들, 즉 □川之原을 뜻한다. 그런데 故國之原에는 묻힌 왕이 세 명이나 되어 故國川王, 故國原王 그리고 故國壤王으로 명칭을 달리하였다.
4419#3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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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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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閭達
朱蒙在夫餘時妻懐孕朱蒙逃後生一子字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主即與母亡而歸之名之曰閭逹委之國事朱蒙死閭達代立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자를 처음에는 여해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국왕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4419#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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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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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宮
莫來子孫相傳 至裔孫宮 生而開目能視 國人惡之 及長凶虐 國以殘破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궁에 이르렀다.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으므로 국인들이 미워하였다. 성장함에 흉악하고 사나워 나라가 그로 말미암아 쇠잔해지고 파멸하게 되었다.
4419#4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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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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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宮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다.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고 태자가 못나 사직을 맡기에 부족하자, 나라 사람들이 궁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에 앉게 하였다. 왕은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 조숙하여 뛰어났다.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4419#37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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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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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伯固
▐ 삼국지는 宮-伯固-伊夷模-位宮으로 이어지는 부자관계를 기록하고 있고 후한서는 宮-遂成-伯固로 이어지는 부자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가 遂成을 빠뜨린 거 같다.
삼국사기는 宮-遂成-伯固-伊夷模-位宮로 이어지는 계통은 후한서와 같으나 伯固-伊夷模만 부자관계고 나머지는 모두 형제관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4419#37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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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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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伊夷謨 0179
故國川王 或云國襄 諱男武 或云伊夷謨 新大王 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竒不肖 共立伊夷謨爲王
고국천왕(혹은 국양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남무(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이고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인 발기가 못났다고 여겨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4419#37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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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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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位宮
伊夷模無子 淫灌奴部 生子名位宮 伊夷模死 立以爲王 今句麗王宮是也 其曾祖 名宮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자 즉위하여 왕이 되니 지금의 구려왕 궁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증조부도 이름이 궁이다.
4419#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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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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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憂位居 0248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장사지냈다. 이름을 동천왕이라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잡목을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의 이름을 시원이라 하였다.
4419#2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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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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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乙弗 0331
葬於羙川之原 號曰美川王
▐ 羙는 美와 같은 한자다.┆平壤¹城 도읍 시기의 왕들은 무덤이 있는 곳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였다. 동천왕의 무덤은 東川에 있었고 중천왕의 무덤은 中川에 있었으며 서천왕의 무덤은 西川 그리고 미천왕의 무덤은 美川에 있었다. 당연히 모두 平壤¹城 인근에 있었을 것이다.
4419#2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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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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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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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永樂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4419#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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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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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璉
세조(북위 탁발도 408-452) 때에 쇠(釗)의 증손 연(璉)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마치면서 아울러 국휘를 청하였다.
-- 국휘는 이름을 짓거나 기록을 남길 때 황제의 이름 글자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4419#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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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인들은 왕위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뀐 시기, 즉 계루부의 대표인 주몽이 소노부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37년 무렵에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하면서 그 이전 소노부 왕권이 통치하던 고구려의 역사를 배제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419#1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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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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