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369 任那 > 0057 三國史記(1145) 脫解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래 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 多婆那는 丹波일 가능성이 있다.
 
0057 三國史記(1145) 1
脫解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吐解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왕의 성은 昔氏로, 왕비는 아효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 1,00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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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2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阿珍浦口에 이르니, 시조 赫居世 재위 39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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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3
이때 바닷가의 할멈이 줄로 끌어서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짝을 열어서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며 따라 다녔으므로, 까치 鵲의 글자를 줄여서 昔으로 씨를 삼고, 또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脫解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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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4
脫解가 처음에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어미를 공양하였는데, 한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배워 공과 이름을 세우도록 해라.”라고 하니, 이에 학문에 정진하여 땅의 이치를 겸하여 알게 되었다. 楊山 아래의 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취하여 거기에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月城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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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5
南解王 5년에 이르러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이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7년에는 등용하여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儒理王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과 사위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를 잇도록 하라.’라고 하셔서 과인이 먼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그 지위를 脫解에게 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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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1
南解王 때 (고본에 임인년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이다. 가깝게는 노례왕의 즉위 이후이므로 양위를 놓고 다투던 일이 없게 되며, 그 이전에는 혁거세의 재위기이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駕洛國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首露王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나는 듯이 달려 雞林의 동쪽 下西知村 阿珎浦(지금도 上西知와 下西知라는 촌명이 있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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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2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이 있었으니 이름은 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의 母였다. 배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하고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로 모여들고 배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이고 넓이는 13자였다. 잠시 후 궤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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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3
칠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말하기를 “나는 본시 용성국(한편 正明國 혹은 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에서 태어나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팔품의 姓骨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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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057 三國遺事(1281) 4
이때 부왕 含達婆가 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삼았는데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모아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던 일이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인연이 있는 곳에 닿으면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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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5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어 칠일 동안 머물렀다. 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 곳을 찾으니 바로 瓠公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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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5
▐ 삼국사기에도 '瓠公의 집을 속임수로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이 뒤에 月城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 瓠公에 대해서는 '본래 왜인으로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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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6
몰래 숫돌과 숯을 곁에 묻어놓고 새벽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과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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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7
남해왕은 그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를 시집보내었는데 이가 바로 阿尼夫人이다. 하루는 탈해가 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하였다.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 하나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遙乃井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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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遺事(1281) 8
弩禮王이 세상을 떠나자 光虎帝 中元 2년 정사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자기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빼앗은 까닭에 성을 昔씨로 하였다. 혹은 까치 덕분에 상자를 열 수 있었기 때문에 새 조를 떼고 성을 昔씨로 삼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궤를 열어서 알을 깨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脫解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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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0 三國遺事(1281)
호공이 밤에 月城 西里를 가는데 始林의 가운데 크고 밝은 빛이 있으며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내려온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은 상자로부터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탈해왕에게 아뢰자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다. 이것은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閼智라 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閼智即郷言小兒之稱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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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三國史記(1145)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聦明多智略 乃名閼智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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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三國史記(1145)
▐ 석탈해는 훗날 월성으로 변하는 자리에 있던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왕이 된 후에 처소에서 월성의 서쪽에 있는 시림의 닭울음 소리를 듣었다고 하므로 석탈해는 호공에게서 빼앗은 집을 왕성으로 발전시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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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eus
Acrisius decided to lock the princess and her baby in an urn and threw both into the sea. At the request of Zeus, Poseidon guided the urn to Seriphus where Perseus and her mother were rescued by Dictys, a fisher and the brother of king Polyd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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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파(丹波 たんば)
단파(丹波 たん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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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전(筑前 ちくぜん)
축전(筑前 ちくぜん)
남쪽의 축후(筑後 ちくご)와 합쳐 축자(筑紫 つくし)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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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운 (出雲 いずも)
출운 (出雲 いず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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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운 또는 단파에서 新羅로
출운 또는 단파에서 新羅로
탈해가 태어났다고 하는 시기는 기원 전후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의 대화를 잘 알지 못했고 왜국은 축자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국의 동북쪽 1천여 리는 출운쯤에 해당된다. 신라와 출운의 교류는 여러 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출운보다 더 동쪽에 있는 단파의 가능성도 있다. 다파나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편, 탈해 이야기에는 호공도 등장하는데 그도 왜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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