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s home >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 (7) 신라의 기원 | 66 |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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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209 삼국지(三國志 289) | R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진승(陳勝) 등이 일어나 온 천하가 진(秦)에 반기를 드니, 연(燕)·제(齊)·조(趙)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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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202 이전 위략(魏略) | R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제(齊)·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準)에게 망명하므로 준(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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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202 이전 삼국지(三國志 289) | R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진(秦)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燕)과 제(齊)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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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202 이전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寖盛故馬韓忌之有責焉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秦)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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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195 이후 사기(史記) | R
燕丹散亂遼閒 滿收其亡民 厥聚海東 以集真藩 葆塞為外臣 연(燕)과 단(丹)의 무리가 요(遼)를 어지럽힐 때 만(滿)은 유민을 거두어 해동에 모아 진번에 집결시키고 변방의 외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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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109 이전 삼국지(三國志 289) | R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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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57-04-15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조선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진한 육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 수풀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에 가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이를 갈라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재주가 특출하고 숙성하였다. 6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므로 이를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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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20-0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寖盛故馬韓忌之有責焉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秦)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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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구려 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낙랑은 313년에 고려에 병합되었으니 이 기록은 고려의 공격으로 낙랑 유민이 신라로 유입되었다는 정도로 재구성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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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고고학적으로 삼한은 목곽묘(木槨墓)와 같은 새로운 묘제와 더불어 한식(漢式) 토기·한경(漢鏡)·대구(帶鉤)·동탁(銅鐸)·화폐·유리 및 수정옥 같은 문물을 낙랑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경주만 하더라도 입실리·죽동리·구정동·조양동 5호분 등지에서 이 같은 낙랑계 유물이 발굴·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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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김유신은 왕경인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후한 건무 18년 임인 구봉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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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 | R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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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0-08-04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 | R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始林의 가운데 크고 밝은 빛이 있으며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내려온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은 상자로부터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친히 숲에 나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있던 아이가 바로 일어났다. 이것은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閼智라 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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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0-08-04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 | R
금상자에서 나왔으므로 김(金)씨를 성으로 삼았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仇刀라고도 한다)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즉위하니 신라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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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0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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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2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 R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味照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선조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나중에 대보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았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沾解)가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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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 R
辰韓者 古之辰國也 진한은 옛 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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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 R
변진 24국 중에서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위략: 그들은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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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후한서(後漢書) 列傳 東夷 | R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 모두 옛 진국이다. 皆古之辰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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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삼국지와 후한서의 차이점 | R
삼국지에서 변한(弁韓)으로 표기된 나라를 후한서에서는 변진(弁辰)으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지에는 진한이 옛 진국이라고 되어 있고 후한서에는 삼한 전체가 옛 진국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마한에서 진왕을 선출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 통치 영역이 삼국지에는 마한의 목지국과 변진한의 12개국이었다고 되어 있고 후한서에는 삼한 전체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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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후한서(後漢書) 東夷 | R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길, 진(秦)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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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제번공직도(526-539) 사로국 | R
國王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其王姓募名泰 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성이 모(募)이고 이름이 태(泰)인 왕이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為範 言語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고 나무에 금을 새겨 표시하였다.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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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양서(梁書 636) | R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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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남사(南史 659) | R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校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성은 모(募), 이름은 태(泰)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d.php?c=1763#4411

0521 양직공도와 제번공직도 해설 | R
송서와 양직공도에 나오는 이야기는 실질적인 국제관계를 반영한 이야기라기보다 각국이 지닌 외교력의 결과로 나타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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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 R
牟即智寐錦王 모즉지매금왕 --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양서에 나오는 募秦은 신라 사신이 牟即이라 한 것을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치면서 양나라 측에서 중국식 성과 이름으로 오해하고 발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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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9 울주천전리각석 | R
另卽知太王 영즉지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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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4 북제서(北齊書 636) | R
是歲,高麗、靺羯、新羅並遣使朝貢。 고려, 말갈 그리고 신라가 사신을 통해 조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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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북제서(北齊書 636) | R
詔以新羅國王金真興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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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수서(隋書 636) | R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高祖拜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김진평에 이른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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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북사(北史 659) | R
傳世三十 至眞平 (傳世三十至眞平 隋書作 傳祚至金眞平 按通典卷一八五新羅傳云 其王姓金名眞平 並引隋東蕃風俗記云 金姓相承 三十餘葉 這裏 眞平 上當脫 金 字) 以隋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세인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나라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문제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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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隋書) 列傳 東夷 | R
新羅國 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신라국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漢)대의 낙랑 땅으로서 사라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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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隋書) 列傳 東夷 | R
魏將毌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爲新羅焉 위(魏)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옥저로 쫓겨 갔다.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 갔는데,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를 세웠다.
http://qindex.info/d.php?c=1763#17537

0636 수서(隋書) 列傳 東夷 | R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신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http://qindex.info/d.php?c=1763#17538

0636 양서(梁書) 列傳 諸夷 | R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 때 유망인들이 역을 피하여 마한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고 그들이 진(秦)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http://qindex.info/d.php?c=1763#27663

0636 양서(梁書) 列傳 諸夷 | R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相係 辰韓不得自立爲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마한의 왕은 항상 진한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http://qindex.info/d.php?c=1763#27803

0636 양서(梁書) 列傳 諸夷 | R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었다.
http://qindex.info/d.php?c=1763#40473

0648 진서(晉書) 列傳 四夷傳 | R
진한(辰韓)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를, 진(秦)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왔는데, 한(韓)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http://qindex.info/d.php?c=1763#36014

0648 진서(晉書) 列傳 四夷傳 | R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진한은 언제나 마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아 비록 대대로 계승하지만 스스로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으니, 그들이 흘러 들어온 사람이 분명한 까닭에 마한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http://qindex.info/d.php?c=1763#27804

0659 북사(北史) | R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진(秦) 때 유망인들이 역을 피하여 가자, 마한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진(秦)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http://qindex.info/d.php?c=1763#32971

0659 북사(北史) | R
또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http://qindex.info/d.php?c=1763#40475

0659 북사(北史) | R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신라는 고려 동남쪽에 있는데, 한(漢) 때의 낙랑 지역이다.
http://qindex.info/d.php?c=1763#32966

0659 북사(北史) | R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었다.
http://qindex.info/d.php?c=1763#40474

0659 북사(北史) | R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일설에 의하면 위(魏)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옥저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를 세웠다고 한다.
http://qindex.info/d.php?c=1763#32968

0659 북사(北史) | R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신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http://qindex.info/d.php?c=1763#32967

0681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 R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秺)侯祭天之胤傳七葉以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http://qindex.info/d.php?c=1763#2260

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 | R
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及漢不見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
http://qindex.info/d.php?c=1763#4407

0864 대당고김씨부인묘명 | R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http://qindex.info/d.php?c=1763#4405

0864 대당고김씨부인묘명 | R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 여기에 나오는 요동(遼東)은 요하 동쪽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라까지 포함하게 된다.
http://qindex.info/d.php?c=1763#4406

0945 구당서(舊唐書) 東夷列傳 | R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之地 東及南方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鄰高麗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漢)대의 낙랑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백제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고려와 인접하였다.
http://qindex.info/d.php?c=1763#34682

1060 신당서(新唐書) 東夷列傳 | R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 한(漢)대의 낙랑 땅에 위치하니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http://qindex.info/d.php?c=1763#34680

1060 신당서(新唐書) | R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신라왕의 성은 김(金)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朴)씨이며 백성에게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http://qindex.info/d.php?c=1763#4412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 R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 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옛날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잉태를 하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자 바다에 배를 띄워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시조 왕이 되었다. 황실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상이다.
http://qindex.info/d.php?c=1763#41856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 R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이 지었고 요극일이 쓴 삼랑사비문에 보인다.
http://qindex.info/d.php?c=1763#2254

1281 삼국유사(三國遺事) | R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沙涿)·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도(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을 또한 도(道)라고도 읽는다.
http://qindex.info/d.php?c=1763#2115

1281 삼국유사(三國遺事) | R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이다. 이름은 사소(娑蘇)이고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얻어 해동에 와서 오래 머물고 돌아가지 않았다. 그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대개 혁거세와 알영 이성(二聖)이 나온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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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동사강목(東史綱目) | R
진한(辰韓)이 비록 연인(燕人)이나 후에 진(秦)이 통일하였기 때문에 통칭하였고 옛사람들이 진(秦)과 진(辰)을 통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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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문무왕비문의 비밀 1 | R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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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문무왕비문의 비밀 2 | R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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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의 후예인가 | R
대당 고故김씨부인 묘명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신라김씨의 조상이 흉노족이라는 주장을 다시 재조명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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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pe route | 16
A brief history of the Scythians | R     culture | 3    East Scythia | R     places | 13    Scythians 1 | R     Scythians 2 | R     steppe, nomads and horsemen | R     The origin of Tartars | R     Thracians | R     黃頭女真 | 7    바람의 제국을 가다 | R     북방 오랑캐 | R     초원의 제국 | R     초원의 제국 2부 | R    

고려 초기 왕명 | 24
01 騶 | R     01 騊 | R     01 鄒牟王 | R     01 騶 | R     01 朱蒙 | R     01 都慕 | R     02 儒留王 | R     02 閭達 | R     03 大朱留王 | R     03 如栗 | R     04 莫來 | R     06 宮 | R     06 宮 | R     06 宮 | R     07 伯固 | R     07 遂成 | R     08 伊夷模 | R     08 伯固 | R     09 位宮 | R     09 位宮 | R     13 乙弗利 | R     14 釗 | R     17 永樂大王 | R     17 璉 | R    

김씨의 거짓과 진실 - 김성회 | R
신라김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네 가지 주장이 있는데 모두 역사적 사실로 보기 힘들다. 진흥왕 이전에는 신라 왕의 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김씨 성을 쓴 시조는 신라계에선 진흥왕이, 가야계에선 김유신(또는 조부인 김무력이나 아버지인 김서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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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유래 - 김성회 | R
한서와 후한서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 국왕과 인명기록을 보면 후마(주몽왕)·마와궁(태조왕)·수성(차대왕)·백고(신대왕)로 쓰고 있으며, 삼국지에도 마·궁수성·백고(고국천왕)·유리모(산상왕)·계(고국원왕)·안(광개토왕) 등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진서에 와서야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이라고 칭하고 사신들에 대해서도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성과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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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김일제 | R
한무제때 한나라의 포로가 된 흉노 왕자 김일제는 한무제의 신임을 받아 노예에서 해방되고 관리로 기용되어 김씨성을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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