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북아 유민의 가장 큰 흐름은 중국, 특히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유민이 흘러가고 또 조선에서 진한으로 유민이 흘러오는 경향이다. 조선이 낙랑이 된 이후에도, 그리고 진한이 신라가 된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졌다.
한편, 백제와 고려가 패망하면서 많은 유민들이 당나라와 왜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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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夫餘 → 百濟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1763#30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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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百濟 → 新羅 ✘
수서에는 옥저로 쫓겨간 고려의 패잔병이 돌아가지 않고 남아 신라를 세웠다는 이야기에 덧붙여 신라의 왕이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싣고 있다.
삼국지에는 백제의 전신인 마한이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왕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바다로 도망가 마한을 차지하고 韓王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서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삼국지의 두 이야기가 섞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763#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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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高麗 → 新羅 ✘
수서에는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쫓겨 옥저로 갔던 고려군 중 일부가 돌아가지 않고 남아 신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북사에도 동일하게 실려 있다. 그러나 진나라의 유민이 진한에 와서 살았고 그 진한에서 신라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먼저 소개한 뒤, '이런 이야기도 있다'며 수서의 이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어 신뢰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1763#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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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樂浪 → 新羅 ✘
수서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런 설명은 북사와 두 당서에서도 이어졌다. 그런데 치소가 대동강 유역에 있는 낙랑이 신라가 일어난 지역까지 아울렀다는 이야기는 매우 어색하다. 신라의 전신인 진한이 형식상 낙랑에 소속되었다거나 낙랑의 유민이 신라나 신라의 전신인 진한으로 흘러온 사실이 와전된 것일까?
아니면 맥고려의 동남쪽에 있던 예를 낙랑고려의 동남쪽에 있는 신라로 착각한 것일까? 예는 한때 한나라 낙랑군 동부도위였었다.
1763#5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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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高麗 → 唐
중국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 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여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여만 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여만 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여만 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63#1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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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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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1 匈奴 → 新羅 ✘
훗날 金氏 성을 쓰게 되는 斯盧의 한 가문은 마한이 망한 뒤 처음으로 왕을 배출하였는데, 가문을 신성화하기 위해 閼智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국명을 雞林으로 바꾸었다.
이 가문은 원래 성이 없었는데, 임나를 병합한 뒤 金氏 성을 쓰고 閼智의 아들 勢漢을 太祖로 숭상하기 시작했다.
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閼智 대신 匈奴 왕자 金日磾와 삼황오제의 少皥金天을 먼 조상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의 명문가에 기대어 가문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1763#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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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韓半島 → 倭
新撰姓氏録은 고대 일본의 왕경 및 주변 지역에 거주한 1천182씨의 본관, 사적, 조상의 유래 등을 실은 계보서다. 헤이안시대(794~1185)를 연 桓武 천황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해 815년에 완성됐다.
한반도계는 백제계가 202씨로 가장 많고, 고구려계 52씨, 신라계 48씨, 가야계 10씨, 고조선계 1씨다. 이렇게 볼 때 고대 일본 씨족 전체에서 한반도계는 26%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연민수 박사는 설명했다.
1763#1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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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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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中華 → 海東 ✘
1116년에 김부식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海東始主를 낳고 仙桃山의 女仙이 되었다는 帝室之女' 이야기를 듣고 이를 삼국사기(1145)에 소개하였다.
이는 고려도경(1124)에 나오는 朱蒙의 어머니 東神聖母인 거 같은데, 김부식은 辰韓의 시조 설화로 오인하였다.
삼국유사(1281)에 와서는 海東始主가 赫居世王으로 특정되었고 仙桃山도 서라벌의 西兄山으로 인식되었다.
1763#30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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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유민의 큰 흐름
고대 동북아 유민의 가장 큰 흐름은 중국, 특히 연나라에서 조선 또는 낙랑으로 유민이 흘러가고 또 조선 또는 낙랑에서 진한 또는 신라로 유민이 흘러가는 경향이다.
그 중에서 특히 진나라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유민이 주목된다. 이들은 연, 제 그리고 조나라 사람들이지만, 위만의 사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듯이, 한반도와 인접한 연나라 사람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일부는 조선에 남아 위만조선을 세웠고 일부는 한국으로 이주하여 진한에 정착하였다 ...
1763#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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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오지 않았다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라와 신라는 고고학적 양상이 백제나 고려과는 이질적이고 초원과 닮은 점이 있다. 금동관, 적석목곽분 그리고 순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 두 나라를 초원에서 흘러온 세력이 세운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중국에서 대동강 유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초원에서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따라서 고고학적 양상은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
1763#1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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