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솔까이야기 > 0317 백제의 요서점유설
 
 0265-0317 진(司馬晋 西晋)
서진 말기의 요서 지역은 모용 선비가 장악하고 있었다. 모용 선비는 285년에 부여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296년에는 고려를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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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5 진서(648)
태강 6년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 모용외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연(前燕)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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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6 진서(648)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침이 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외는 매번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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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0-0390 三韓의 재편
진나라가 쇠약해지며 요동과 한반도는 재편의 과정을 겪게 된다. 낙랑과 대방은 고려에 통합되고 마한과 진한은 각각 백제와 신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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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6-08 삼국사기(1145)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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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 이전 송서(488)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 송서가 씌어질 당시 부여는 고려에 흡수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백제는 부여의 후손을 자처하며 다녔다. 북방의 상황을 잘 모르는 유송이 부여를 백제로 착각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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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 이전 양직공도(526-539 梁職貢圖)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駒麗畧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백제는 옛날 흘러온 오랑캐로 마한에 속했는데, 진(西晉 265-317 東晉 317-420) 말기에 고려가 요동과 낙랑을 공략하니 요서의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 송서에 비해 진나라 말이라는 시기와 고려가 낙랑을 점유했다는 내용이 더해졌다. 고려가 낙랑을 병합한 것은 313년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진나라는 서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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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 이전 양서(636)
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진나라 때 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두 군 땅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두었다. -- 송서와 양직공도에 비해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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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 이전 남사(659)
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진나라 때 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두 군 땅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와 내용이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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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 이전 동사강목(1778)
중국 사람들이 항상 부여와 백제를 혼동해 일컫기 때문에 남사에는, “진(晋) 때 구려가 요동을 점유하고 백제 또한 요서의 진(晋)ㆍ평(平) 두 고을을 점거하였다.”고 하였고, ... 이와 같은 여러 말은 모두 중국에서 그릇 전문된 것인데, 억단하여 의견을 세워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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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 이전 고등학교 교과서(2003)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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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3 양서(636)
모용외의 아들 황(晃)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쇠(釗 고국원왕)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황(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환도(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구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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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5 진서(648)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 구려, 백제, 우문 그리고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 백제인이 모용 선비의 포로가 되어 요서 조양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백제를 부여로 바꾸면 자연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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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6 자치통감(1084)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전에 부여가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해왔는데 방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기 때문에 부여를 침공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 나오게 하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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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6 동사강목(1778)
자치통감 진목제 영화 2년에는,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있다가 백제(구려의 오류인 듯하다)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소산해지므로 서쪽으로 옮겨 연(燕)에 근접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말은 모두 중국에서 그릇 전문된 것인데, 억단하여 의견을 세워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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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6 동사강목(1778)
양직공도(526-539)는 백제를 마한에 속한다고 하였고(百濟舊來夷馬韓之屬) 최치원은 900년 이전에 당나라에 가서 마한은 고려가 되었다고 했다(馬韓則髙麗). 원래 고려라 기록된 것을 최치원 식의 인식에 의해 마한으로 바꿔 기록했다가, 다시 양직공도 식의 인식에 의해 백제로 바꿔 기록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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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20-0479 송(劉宋)과 0386-0534 위(北魏)
남북조 시기의 요서 지역은 선비족이 세운 연(燕)이 전연, 후연 그리고 북연으로 바뀌며 점유하고 있었고 436년에 북연이 위(北魏)에 흡수된 이후로는 북중국의 패자인 위에 의해 안정적으로 점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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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2 위서(554)
신(臣, 개로왕)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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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2 위서(554)
연(璉 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안(安) 등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안 일행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은 옛날 여경(개로왕)과의 원수관계가 있음을 말하며 동쪽으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안 일행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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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75 위서(554)
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가 여경(개로왕)에게 새서를 내려 그의 정성을 포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 등은 바닷가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끝내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http://qindex.info/i.php?f=1989#5574
 
 0475-0561 百濟의 남하
고려의 침공을 받아 백제는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http://qindex.info/i.php?f=1989#5571
 
 0488 자치통감(1084)
永明六年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 488년에 위(北魏)가 군사를 보내 침공했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 남제서(537)의 기록을 요약한 것인데 연도를 잘못 표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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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90 남제서(537)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大破之 490년에 위노(北魏)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그리고 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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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90 남제서(537)
이 기록은 495년에 동성왕이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씌어진 것이다. 동성왕이 일반적인 멸칭인 험윤 또는 흉리라 한 것을 남제서는 북위에 대한 멸칭인 위노로 바꾸어 놓았다. 남제는 북위와 적대관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북위는 472년에 육로로 백제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에 막혀 되돌아왔고 475년에는 바닷길로 사신을 보냈으나 역시 바람을 만나 되돌아왔다. 백제에 기병 수십만을 보낼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보낼 이유도 없었고. 백제 또한 475년에 고려의 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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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95 남제서(537)
495년에 모대(동성왕)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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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95-08 삼국사기(1145)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소지 마립간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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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6 기문분쟁 직후
475년에 고려에게 한성을 빼앗긴 백제는 웅진으로 내려와 조금씩 재기하고 있었다. 512년에 왜로부터 임나 4현을 얻었고 역시 왜의 지원을 받아 가라로부터 기문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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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38 삼국사기(1145)
봄에 서울을 사비(다른 이름은 소부리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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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5 북사(659)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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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70 북사(659)
제(北齊)의 후주는 여창(위덕왕)을 사지절 시중 차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예전처럼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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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71 북사(659)
又以餘昌爲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또 여창(위덕왕)을 지절 도독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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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71 북사(659)
동청주는 오늘날 중국의 산동지방을 가리킨다. 요서점유설과는 지역이 다르고 연대도 25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북제는 일 년 전에 위덕왕에게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이란 작위를 주었었고 6년 전에는 신라 진흥왕에게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의 작위를 주었었다. 이 당시 대방과 백제는 거리가 멀었고 낙랑과 신라도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이러한 작위들은 실질적인 것이 아니라 외교적인 인사치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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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71 고등학교 교과서(2003)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http://qindex.info/i.php?f=1989#810
 
 0677 구당서(945)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죽었다. 그의 손자 경(敬)이 측천 때에 대방군왕에 습봉되어 위위경을 제수받았다.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http://qindex.info/i.php?f=1989#27407
 
 0677 동사강목(1778)
통전과 당서에, “백제가 망하니, 그 땅이 신라ㆍ발해ㆍ말갈에게 분할되었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서 그 글을 인용하였고, 통감에서도 그를 따랐으니 잘못이다. 발해ㆍ말갈과 백제는 서로 남북으로 동떨어져 있는 사이라, 비록 침략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 땅을 나누어 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를 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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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0 이전 삼국사기(1145)
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髙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입니다. --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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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00 이전 삼국사기(1145)
髙麗百濟全盛之時強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고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 월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북경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의 연과 제, 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 최치원이 당나라 관리에게 고려와 백제를 비난하며 했던 말이다. 일종의 외교문서이고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http://qindex.info/i.php?f=1989#26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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