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와 위서 사이에 일어난 일들.
•
0286 진서(648)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침이 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외는 매번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9841#9869
SIBLINGS
CHILDREN
9869
•
0294 진서(648)
北虜侵掠北平以彬為使持節監幽州諸軍事領護烏丸校尉右將軍 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復秦長城塞自溫城洎于碣石綿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烽堠相望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당빈(235~294)을 사지절 유주제군사 령호오환교위 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진장성과 요새를 복구했는데 온성에서 시작해서 갈석까지 3천리에 이어졌다. 군사를 나눠 주둔시키고 봉수로 서로 연락하게 하였다.
▶갈석산 동쪽은 실질적으로 모용 선비의 영역이 되었고 낙랑과 대방은 고립되었다.
9841#9873
SIBLINGS
CHILDREN
9873
•
0311 진서(648)
时二京倾覆幽冀沦陷廆刑政修明虚怀引纳流亡士庶多襁负归之廆乃立郡以统流人冀州人为冀阳郡豫州人为成周郡青州人为营丘郡并州人为唐国郡
두 서울이 무너지고 유주와 기주가 함락되었는데 모용외가 형벌을 밝게 하고 마음을 비워 사람들을 끌어안으니 떠돌던 많은 선비와 서민들이 아이를 업거나 짐을 지고 그에게 귀부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군을 세워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니 기주인은 기양군, 예주인은 성주군, 청주인은 영구군 그리고 병주인은 당국군에 속하게 했다.
9841#9831
SIBLINGS
CHILDREN
9831
•
0313 자치통감(1084)
遼東張統據樂浪 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9841#9883
SIBLINGS
CHILDREN
9883
›
0313↝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
기원전 108년에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은 서진 때까지 존속하다 313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그러자 모용 선비가 그 유민을 받아 자신의 영토 내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모용 선비의 연나라를 흡수한 북위 때에는 낙랑군이 요서의 영주에 있었는데 다시 하북의 남영주로 옮겨졌다.
대방은 낙랑과 이동 경로가 같고 조선은 북위 때 산해관 서쪽에 있었다.
313년 이후 옮겨간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의 위치를 가지고 처음 설치된 위치라 주장하는 오류가 있다.
9841#11611
SIBLINGS
CHILDREN
OPEN
›
0317 百濟의 요서점유?
송서(488) 등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고 되어 있는데, 서진 말에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지 못했으며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당시 창려, 요동 등 서진의 평주는 모용부 선비가 차지했고 요서, 북평 등 유주는 단부 선비가 차지했었다.
고구려의 자리에 모용을 넣고 백제의 자리에 단을 넣어야 자연스럽다.
9841#1989
SIBLINGS
CHILDREN
OPEN
•
0337~0370 前燕
요서 일대에 살던 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鄴으로 옮겼다. 370년 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龍城-營州-柳城-朝陽
9841#7358
SIBLINGS
CHILDREN
7358
•
0345 진서(648)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
구려, 백제, 우문 그리고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백제인이 모용 선비의 포로가 되어 요서 조양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9841#9905
SIBLINGS
CHILDREN
9905
•
0346 동사강목(1778)
▶양직공도(526-539)는 백제를 마한에 속한다고 하였고(百濟舊來夷馬韓之屬) 최치원은 900년 이전에 당나라에 가서 마한은 고려가 되었다고 했다(馬韓則髙麗).
원래 고려라 기록된 것을 최치원 식의 인식에 의해 마한으로 바꿔 기록했다가, 다시 양직공도 식의 인식에 의해 백제로 바꿔 기록한 것은 아닐까?
9841#9913
SIBLINGS
CHILDREN
9913
•
0407~0436 연(北燕)
후연에서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이전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2년 뒤 고운이 살해되자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아 북연은 망하고 풍홍은 고려로 망명했다가 살해되었다.
9841#9832
SIBLINGS
CHILDREN
9832
•
0432.08 위서(554)
文通使數萬人出城挑戰,昌黎公元丘與河間公元齊擊破之,死者萬餘人。文通尚書高紹率萬餘家保羌胡固。己卯,車駕討紹,辛巳,斬之。詔平東將軍賀多羅攻文通帶方太守慕容玄於猴固,撫軍大將軍、永昌王健攻建德,驃騎大將軍、樂平王丕攻冀陽,皆拔之,虜獲生口,班賜將士各有差。
▶연나라가 대방군을 설치하고 대방 태수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방군의 위치는 요령 의현 북부(辽宁义县北)로 추정된다.
9841#9977
SIBLINGS
CHILDREN
9977
•
0432.09 위서(554)
徙營丘成周遼東樂浪帶方玄菟六郡民三萬家于幽州 開倉以賑之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주민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눠주었다.
▶북위는 북평군을 설치하고 조선과 신창 두 현을 두어 조선민을 조선현에 안집하였다. 이 조선민은 북위가 432년에 끌어온 3만 가구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북평군은 모두 430호 1836구였으므로 북연의 낙랑군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 수백 가구 있었던 듯하다.
9841#9978
SIBLINGS
CHILDREN
9978
•
0436± 요서군과 북평군 내력
▶위서의 평주에는 요서군(비여,양악,해양)과 북평군(조선,신창)이 있었다.
高齊가 조선을 신창에 합치고, 요서군을 폐지하면서 해양을 비여에 합친 후 북평군에 넣어, 북평군에는 신창과 비여 두 현이 있게 되었다.
隋는 586년에 비여를 신창에 합쳐, 북평군에는 신창 하나만 남게 되었다.
隋는 598년에 신창을 노룡으로 개명하였다.
隋는 605년 이후 다시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마침내 북평군에는 노룡현 하나만 있게 되었다.
9841#15104
SIBLINGS
CHILDREN
15104
•
0444 위서(554) 營州
營州領郡六縣十四昌黎郡領縣三龍城廣興定荒建德郡領縣三石城廣都陽武遼東郡領縣二襄平新昌樂良郡領縣二永洛帶方冀陽郡領縣二平剛柳城營丘郡領縣二富平永安
영주(6군,14현) - 창려군(201호,용성,광흥,정황), 건덕군(200호,석성,광도,양무), 요동군(131호,양평,신창), 낙랑군(219호,영락,대방), 기양군(89호,평강,유성), 영구군(182호,부평,영안).
9841#9835
SIBLINGS
CHILDREN
9835
•
0533 위서(554) 南營州
南營州領郡五縣十一昌黎郡領縣龍城廣興定荒遼東郡領縣二太平新昌建德郡領縣石城廣都營丘郡領縣三富平永安帶方樂良郡領縣一永樂
남영주(5군,11현) - 창려군(509호,용성,광흥,정황), 요동군(565호,태평,新昌), 건덕군(178호,석성,광도), 영구군(512호,부평,영안,대방), 낙랑군(49호,영락).
9841#9934
SIBLINGS
CHILDREN
99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