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488) 등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고 되어 있는데, 서진 말에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지 못했으며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당시 창려, 요동 등 서진의 평주는 모용부 선비가 차지했고 요서, 북평 등 유주는 단부 선비가 차지했었다.
고구려의 자리에 모용을 넣고 백제의 자리에 단을 넣어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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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書(488)
▶晋平郡이나 晋平縣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나라의 유주에는 遼西郡과 北平郡이 있었는데, 진평은 북평의 와전일 가능성이 있다. 송서는 488년에 남조의 제나라에서 편찬한 유송의 역사서인데, 그들은 북조의 지리에 대해 잘 몰랐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제서(537)에는 백제가 고려(獫狁,匈梨)의 침공을 물리쳤다는 표문을 보고 북위(魏虜)의 침공을 물리친 것으로 잘못 기록해 놓았는데, 이와 유사할 수 있다.
1989#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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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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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636)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에 이르러 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양직공도(526~538)에 비해 진(西晉 265~317, 東晉 317~420) 시기로 범위가 더 넓어졌다. 백제군이라는 명칭이 추가되었는데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1989#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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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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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0315 高句麗와 百濟
○ 고구려는 302년에 현도군을 침공하였고 312년에는 요동국 서안평현을 차지했으며 313년과 314년에는 각각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315년에는 다시 현도군을 침공하였다.
이것은 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였다(高驪略有遼東)는 표현에 어울리지 않는다.
○ 백제는 304년에 낙랑군의 서쪽 현을 빼앗았다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왕이 살해되었다.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는(百濟略有遼西)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1989#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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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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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5 진서(648)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鹹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
구려, 백제, 우문 그리고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모용 선비는 285년에 부여를 멸망시켰는데 부여 재건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 기록의 백제는 부여의 오기다.
1989#27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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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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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6 자치통감(1084)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있었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쇠약해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방어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연왕 황이 세자 준, 모용각 그리고 모여근 세 장군으로 하여금 17000기를 이끌고 부여를 공격하게 했다.
▶부여를 서쪽으로 밀어내는 일은 인접한 고구려가 가능하고 백제는 불가능하다.
1989#27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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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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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0 南齊書(537)
▐ 동성왕이 495년에 보낸 표문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표문에서 獫狁 또는 匈梨라 한 것을 여기서는 魏虜로 바꾸어 놓았다. 북위가 백제를 침공할 이유는 없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554)에도 나오지 않는다. 당시 백제는 고려와 잦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표문의 험윤은 고려라고 보아야 한다. 전래 기록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삼국사기(1145)는 남제서에서 자치통감(1084)으로 이어지는 기록을 계승했다.
198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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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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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5 남제서(537)
495년에 모대(동성왕)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1989#39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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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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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7 구당서(945)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죽었다. 그의 손자 경(敬)이 측천 때에 대방군왕에 습봉되어 위위경을 제수받았다.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1989#27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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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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