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3. 왜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 (3) 왜의 한국 개입
 
 0290-0390 三韓의 재편
중국에서 서진이 망해가면서 요동과 한국은 재편되었다.
 
 0364-07 일본서기(720)
탁순왕 말금한기가 사마숙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년 7월 중에 백제인 구저, 미주류, 막고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귀국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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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66-03 일본서기(720)
사마숙니를 탁순국에 보내었다. 사마숙니는 종자 이파이와 탁순인 과고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색비단 각 1필과 각궁전 및 철정 40매를 이파이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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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66~0369 6주갑조정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백제의 마한 병합 기록을 6주갑 인하하면 369년 즈음의 일이 된다. 그러나 백제가 병합했다는 지역과 왜와 백제가 합동으로 쓸고갔다는 지역은 위치나 범위에서 차이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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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67-04 일본서기(720)
백제왕은 구저, 미주류, 막고를 보내어 조공하도록 하였다. 그때 신라국의 조사(調使)도 구저와 함께 왔다. 천웅장언을 신라에 파견하여 백제의 헌상물을 함부로 바꾼 것을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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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69 전후의 기록들
이 시기를 전후해서는 왜가 한국에 개입한 흔적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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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03 일본서기(720)
백제왕이 또 구저(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무내숙니(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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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일본서기(720)
이 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구저(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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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2 일본서기(720)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 1자루와 칠자경(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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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2-01 진서(648)
백제와 임읍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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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2-06 진서(648)
백제왕 餘句를 진동장군 낙랑태수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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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82 일본서기(720)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襲津彥)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사지비궤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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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84 일본서기(720)
백제국 貴須王이 죽었다. 왕자 枕流王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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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85 일본서기(720)
백제 枕流王이 죽었다. 왕자 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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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85-11 삼국사기(1145)
辰斯王은 近仇首王의 둘째 아들이요 枕流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枕流王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辰斯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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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0 일본서기(720)
황태자(응신)가 즉위했다. 이 해의 간지는 경인(庚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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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0 天皇の在位年と西暦対照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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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0 天皇の歴史
응신 천황은 신무 천황의 후손이다. 신무 천황이 구주의 일향에서 동정에 나서 내량 지방을 점령하고 대화 왕조를 열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응신 천황을 대화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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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왜의 한국 개입
 
 0391-03 일본서기(720)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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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5 삼국사기(1145)
광개토왕은 이름이 담덕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태어나서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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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7 삼국사기(1145)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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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10 삼국사기(1145)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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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광개토왕릉비(414)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런데 왜가 391년에 ▨을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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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01 삼국사기(1145)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나물 이사금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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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02 일본서기(720)
황전별(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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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05 일본서기(720)
천웅장언(千熊長彦)과 구저(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다사성(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으로 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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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07 삼국사기(1145)
고구려 왕 담덕(談德)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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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08 삼국사기(1145)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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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10 삼국사기(1145)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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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11 삼국사기(1145)
辰斯王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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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11 삼국사기(1145)
阿莘王(阿芳이라고도 한다)은 枕流王의 맏아들이다. 枕流王이 사망하였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 辰斯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재위 8년에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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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일본서기(720)
백제의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倭)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기각숙니·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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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3-05 삼국사기(1145)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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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3-07 삼국사기(1145)
백제가 침략해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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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3-08 삼국사기(1145)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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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4-07 삼국사기(1145)
고구려와 수곡성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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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4-08 삼국사기(1145)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 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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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5-11 삼국사기(1145)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한 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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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09 일본서기(720)
고려인·백제인·임나인·신라인이 함께 내조하였다. 그 때 무내숙니에게 명하여 여러 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韓人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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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광개토왕릉비(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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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7-03 일본서기(720)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直支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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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7-05 삼국사기(1145)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腆支를 볼모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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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8-08 삼국사기(1145)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곧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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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9 광개토왕릉비(414)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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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광개토왕릉비(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安羅人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지고  ... 옛적에는 新羅寐錦이 몸소 고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 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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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02-01 일본서기(720)
황태자(이중)는 반여치앵궁(磐余稚櫻宮)에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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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1-07 삼국사기(1145)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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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2 삼국사기(1145)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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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2-02 삼국사기(1145)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나물이 죽고 그 아들이 어려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http://qindex.info/i.php?h=8274#8274
 
 0402-05 삼국사기(1145)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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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3-02 삼국사기(1145)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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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3-02(283) 일본서기(720)
백제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다. 진모진이라고 하는데, 이가 오늘날 내목의봉(來目衣縫)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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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3-07 삼국사기(1145)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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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3¦일본서기(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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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4-08 일본서기(720)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아직기는 또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은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의 조상인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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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4¦광개토왕릉비(414)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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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5-03-15 일본서기(720)
천황(이중)이 옥체에 병이 들어 신체가 조화롭지 못하였다. 치앵궁에서 죽었다. 당시 7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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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5-09 삼국사기(1145)
腆支王은 阿莘이 재위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腆支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腆支는 왜인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腆支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h=8282#8282
 
 0405¦일본서기(720)
백제의 阿花王이 죽었다. 천황(응신)은 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이다.
http://qindex.info/i.php?h=8286#8286
 
 0413 ~ 0502ᑀ 왜5왕
왜는 438년부터 478년까지 송(劉宋)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 신라, 임나, 진한 그리고 모한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주장했다.
http://qindex.info/i.php?h=1303#1303
 
 0413 ~ 0502ᑀ 왜5왕
 
 0413 ~ 0502ᑀ 왜5왕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왜의 신라 침공 기록이다. 393년부터 500년까지 잦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간헐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393년부터 500년까지의 신라 침공을 왜5왕의 짓으로 볼 수 있다.
 
 0413 양서(636)
晉安帝時有倭王贊 贊死立弟彌 彌死立子濟 濟死立子興 興死立弟武 齊建元中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高祖卽位進武號征東將軍 진나라 안제때 왜왕 贊이 있었다. -- 진서의 기록을 토대로 시기를 413년으로 특정한다.
http://qindex.info/i.php?h=2833#2833
 
 0413 진서(648)
義熙 九年 是歲高句麗倭國及西南夷銅頭大師並獻方物 -- 양서의 기록을 토대로 왜왕 찬이 조공한 것으로 간주한다.
http://qindex.info/i.php?h=8305#8305
 
 0421 송서(488)
高祖永初二年詔曰倭讚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 고조가 조서를 내렸다. "왜의 讚이 만리 먼 곳에서 공물을 바쳤다. 먼 곳에서 보인 성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벼슬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http://qindex.info/i.php?h=8306#8306
 
 0425 송서(488)
太祖元嘉二年讚又遣司馬曹達奉表獻方物 讚이 또 사마 조달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특산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h=8307#8307
 
 0430 송서(488)
(元嘉七年春正月癸巳) 是月倭國王遣使獻方物 이달에 왜국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h=8308#8308
 
 0430-02-15 일본서기(720)
천황(응신)이 명궁(明宮)에서 죽었다. 이때 나이 110세였다. 어떤 책에는 대우궁(大隅宮)에서 죽었다고 한다.
http://qindex.info/i.php?h=8257#8257
 
 0433-01-03 일본서기(720)
대초료존(인덕)이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하였다. 궁전을 난파에 지었는데, 이것을 고진궁(高津宮)이라 한다. 궁전의 담장과 건물에는 흰색을 칠하지 않았다. 서까래, 들보, 기둥도 장식하지 않았다. 억새로 지붕을 이을 때에도 끝을 가지런히 하지 않았다. 이는 사사로운 이유로 백성이 밭을 갈고 베 짜는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함이었다.
http://qindex.info/i.php?h=8252#8252
 
 0433~0519 황남대총과 대선릉고분
위의 왼쪽 쌍분이 황남대총이고 아래 제일 큰 전방후원분이 대선릉고분이다. 황남대총은 350~450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대선릉고분은 인덕 천황(433~519)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 길이가 120m와 525m로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크다. 일본서기에는 인덕 천황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궁전을 검소하게 지었다고 하는데 무덤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0438 송서(488)
(元嘉十五年夏四月己巳) 以倭國王珍為安東將軍 왜국왕 珍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是歲 武都王 河南國 高麗國 倭國 扶南國 林邑國並遣使獻方物 이해에 무도왕, 하남국, 고려국, 왜국, 부남국, 임읍국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h=8309#8309
 
 0438 송서(488)
讚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表求除正詔除安東將軍倭國王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詔並聽
http://qindex.info/i.php?h=8310#8310
 
 0438 송서(488)
讚이 죽자 아우 珍이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珍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 송서 본기 문제 원가 15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시점을 438년으로 특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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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3 송서(488)
(元嘉二十年) 是歲河西國高麗國百濟國倭國並遣使獻方物 이 해에 하서국, 고려국, 백제국, 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h=8312#8312
 
 0443 송서(488)
(太祖元嘉) 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為安東將軍倭國王 왜국왕 濟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
http://qindex.info/i.php?h=8313#8313
 
 0451 송서(488)
(元嘉二十八年) 秋七月甲辰安東將軍倭王倭濟進號安東大將軍 안동장군 왜왕 濟를 안동대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http://qindex.info/i.php?h=8314#8314
 
 0451 송서(488)
(元嘉)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并除所上二十三人軍郡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軍과 君을 제수하였다. -- 왜가 요청한 6개 나라에서 백제를 빼고 가라를 넣어주었다.
http://qindex.info/i.php?h=8315#8315
 
 0460 송서(488)
(大明四年) 倭國遣使獻方物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h=8316#8316
 
 0462 송서(488)
(大明六年) 以倭國王世子興為安東將軍 왜국 왕세자 興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http://qindex.info/i.php?h=8317#8317
 
 0462 송서(488)
濟死世子興遣使貢獻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藩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
http://qindex.info/i.php?h=8318#8318
 
 0462 송서(488)
濟가 죽자 세자인 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조하여 "왜왕의 세자 興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 송서 효무제 대명 6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시점을 462년으로 특정한다.
http://qindex.info/i.php?h=8319#8319
 
 0462 남사(659)
濟死世子興遣使貢獻孝武大明六年詔授興安東將軍倭國王 濟가 죽자 세자인 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효무제 대명 6년에 조하여 興을 안동장군 왜국왕에 제수하였다.
http://qindex.info/i.php?h=8320#8320
 
 0477 송서(488)
(昇明元年) 倭國遣使獻方物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h=8321#8321
 
 0478 宋書(488), 南史(659)
興이 죽자 아우인 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였다.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동으로 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 眾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海北 95국을 평정하였습니다.
http://qindex.info/i.php?h=8322#8322
 
 0478 宋書(488), 南史(659)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句驪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고 하고 변방에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武를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http://qindex.info/i.php?h=8311#8311
 
 0519-01-16 일본서기(720)
천황(인덕)이 죽었다.
http://qindex.info/i.php?h=8293#8293
 
 ¦대화(大和 やまと) 왕조
아래의 倭는 동일한 왕조라고 보아야 한다. 391년에 한국에 진출해서 백제와 손을 잡고 가라와 신라를 점령하였으며 404년에 고려의 대방 지역을 침공하였다는 倭 - 광개토왕릉비(414) 397년에 백제로부터 볼모를 받았다가 405년에 백제의 왕이 죽자 그 볼모를 돌려보내 백제의 왕위를 잇게 하였다는 倭 - 일본서기(720)와 삼국사기(1145) 413년에 讚이라는 왕이 있었고 478년까지 珍, 濟, 興 그리고 武라는 왕이 이어지며 유송에 조공을 했 ...
http://qindex.info/i.php?h=8366#8366
 
 ¦일본서기 신공황후조 분석
신공황후 49년의 사건은 엄청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록에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일본서기가 없던 사건을 만들어 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니 이 사건도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이 기록과 가장 근접한 것은 광개토왕릉비의 391년조 기록이다. 그래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을 391년에 일어난 것으로 설정한다.
http://qindex.info/i.php?h=8251#8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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