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地理志 > -0108 漢郡 > 玄菟 > 西蓋馬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옥저가 있었으니 서개마는 옥저의 서쪽에 있었다. 이곳의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가고 염난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개마대산은 지금의 두류산이다. 西蓋馬 → 蓋馬國 → 乙離骨
 
-0107 三國志(289)
한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沃沮城으로 玄菟郡을 삼았다.
20952 SHARED
 
-0107 @옥저성 @沃沮城
-0107 @옥저성 @沃沮城
▐ 옥저성이 있었던 곳으로는 지금의 길주가 유력하다.
23495 SHARED
 
-0082 後漢書(445)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23489 SHARED
 
-0075 三國志(289)
夷貊의 침략을 받자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현으로 만들어 낙랑에 소속시켰다.
23492 SHARED
 
-0075  현도군이 옮겨간 곳은 혼하다.
-0075 현도군이 옮겨간 곳은 혼하다.
23493 SHARED
 
-0075 後漢書(445)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을 갈라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에 치소를 두었다.
23490 SHARED
 
-0032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 4년 후 북옥저를 정벌한 것을 볼 때, 행인국은 맥고려와 북옥저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태백산은 장백산이 되고 행인국은 그 동남쪽인 두만강 상류 지역이 된다. 압록강을 거슬러 행인국으로 가는 길에 구다국과 개마국 인근을 지났을 테지만 각각 한나라 현도군에 소속된 상은태현과 서개마현이라 건드릴 수 없었을 듯하다.
23485 SHARED
 
-0028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北沃沮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23484 SHARED
 
0003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23497 SHARED
 
0008 漢書(82)
玄菟郡 縣三 高句驪(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上殷台 西蓋馬(馬訾水 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一千一百里) 고구려(요산은 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 남소가 있어 물이 서북쪽으로 흘러 변경을 경유한다.) 서개마(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
17030 SHARED
 
0008 @마자수 @馬訾水 @염난수 @鹽難水
0008 @마자수 @馬訾水 @염난수 @鹽難水
▐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염난수고 지금의 압록강이다. 마자수는 염난수의 지류인데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허천강이 이 조건에 맞는다. 2군(현도와 요동)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는 설명은 염난수에 대한 것이다.
15005 SHARED
 
0012 漢書(82)
왕망(9~23)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23496 SHARED
 
0014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병력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병력을 내어 보내 漢의 高句麗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縣은 현도군에 속하였다.)
23486 SHARED
 
0026 三國史記(1145) 高句麗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母虜掠 但以其地爲郡縣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였다.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 현도군 西蓋馬현으로 추정된다.
14559 SHARED
 
0026 三國史記(1145) 高句麗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舉國來降 구다국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 12년에 추모왕이 피살된 이후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을 침공하기 시작했는데, 14년에 현도군 고구려현을 침공하였고 26년에는 현도군 서개마현을 침공한 듯하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구다국은 현도군 上殷台현일 가능성이 있다.
20904 SHARED
 
0030 三國志(289)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도위도 폐지하였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華麗·沃沮 등의 제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 한나라의 군현에서 빠지는 것은 곧 한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23491 SHARED
 
0032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낙랑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낙랑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23487 SHARED
 
0037 三國史記(1145) 高句麗
王襲樂浪²滅之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 이 사건 이후 백제의 동변과 신라의 북변을 자주 침략하던 낙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때 멸망당한 낙랑은 삼국사기에서 ᐥ36년, 14년 그리고 4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2년에 백제를 침공했으며 -6년에 백제에 의해 東有樂浪²이라 불리웠고 -8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했다ᐥ는 그 樂浪²과 동일한 낙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3488 SHARED
 
0056 三國志(289)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남쪽으로 예맥과 경계를 접했다.
23437 SHARED
 
0056 @개마대산 @蓋馬大山
0056 @개마대산 @蓋馬大山
▐ 沃沮는 지금의 길주로 추정되므로 蓋馬大山은 허천강 유역과 동해 연안을 가르는 길주 서북쪽의 頭流山이 어울린다. 그러면 이 蓋馬大山의 서쪽을 흐르는 허천강은 西蓋馬를 흘렀다는 馬訾水의 조건에 들어맞고 西蓋馬는 허천강 유역이 된다. 蓋馬大山 자리에 頭流山을 넣었을 때 어색해지는 기록은 아직 없다. 沃沮城, 蓋馬大山, 西蓋馬 그리고 馬訾水는 훗날의 吉州, 弓漢嶺, 乙離骨 그리고 乙離骨水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다.
23498 SHARED
 
0056 三國史記(1145) 高句麗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넓혀 동쪽으로는 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薩水까지 이르렀다. ▐ 단단대령 동쪽으로는 두만강에서 북한강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23499 SHARED
 
0056 맥고려의 한나라 변경 잠식
0056 맥고려의 한나라 변경 잠식
0014 高句麗縣 ┆ 0026 蓋馬國(西蓋馬縣) ┆ 0026 句茶國(上殷台縣) ┆ 0032 崔理樂浪(東暆縣) ┆ 0037 東有樂浪(옛 臨屯郡縣) ┆ 0056 東沃沮(夫租縣) ▐ 12년에 추모왕이 중국에 의해 살해되자 맥고려는 현도군의 고구려, 서개마 그리고 상은태 세 개 현을 모두 차지하였고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자 그에 속했던 동이, 부조 등도 침공하여 차지하였다.
23494 SHARED
 
0220 「三國誤記」 蓋馬大山 後漢書註
其山在今平壤城(西→)東 개마대산은 지금 평양성의 동쪽에 있다.┆삼국지(289)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이 있었고 조선의 동쪽에 예가 있었으며 예의 북쪽에 고구려와 옥저가 있었는데,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다. 평양성은 조선에 있었으니 개마대산은 그 동쪽에 있었다.
29642 SHARED
 
1108 尹瓘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여진은 본디 구고려의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이며 남쪽으로는 장주·정주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구고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14049 SHARED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1874 承政院日記
顧玆咸吉一道 最是觀察雄藩 數千里海帶山衿 左滄溟而右蓋馬 함길도는 아주 큰 관찰의 웅번으로 수천 리 땅이 바다를 끼고 산으로 둘려 있어서 왼쪽에는 창명이요 오른쪽은 개마다.
20932 SHARED
 
1879 承政院日記
最重關北一省 控滄海蓋馬之勢 地理鍾靈 관북 일성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창해와 개마의 형세를 제어하니 지리의 영험이 모인 곳이다. ▐ 蓋馬가 두류산이 아니라 두류산을 지나 동해안과 나란히 뻗어있는 산맥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20964 SHARED
 
1955-
21161 SHARED
 
@개마대산 @두류산
23445 SHARED
 
頭流山
두류산의 북쪽에서 吉州南大川이, 남쪽에서 端川北大川과 서천이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든다.
23454 SHA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