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東女眞이 왕고와 접촉하는 창구는 和州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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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08 高麗史(1451)
黑水蕃 鶻巖城
윤선은 염주 사람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용맹하였고, 군사를 지휘하는 것을 잘했다. 과거에 궁예가 사람 죽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였고, 마침내 그의 족당을 이끌고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2,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골암성에 주둔하여 흑수번의 무리들을 불러 모았고, 시간이 흐르자 변방 군들에 해를 끼쳤다. 태조가 즉위하자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귀부하여 북쪽 변방이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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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03 高麗史(1451)
北狄 北蕃 鶻岩鎭
태조는 북계의 골암진이 자주 북적의 침입을 받자 명하여 가도록 하니, 유금필은 그날 바로 개정군 3,000명을 거느리고 떠났다. 골암진에 이르러서 東山에 큰 성을 쌓아 웅거하였는데, 북번의 추장 300여 명을 불러 모아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놓고 잔치를 열고 그들이 취한 틈을 타서 위엄을 갖추고 협박하니 추장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 일이 있고나서 북방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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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6 高麗史(1451)
黑水 達姑
대상 유금필과 원윤인 관무·관헌 등에게 흑수·달고·철륵(鐵勒) 등 변방의 정예 기병 9천 5백 명을 지휘하게 하였다.
▐ 921년에 達姑狄 171명이 신라를 치기위해 登州를 지나려던 적이 있었다.
鐵勒은 발해의 鐵利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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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6 골암은 흑수와 접하는 곳이었다
○ 궁예에게서 떨어져나간 윤선은 2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골암성에 주둔하며 흑수번의 무리를 불러 궁예의 변방 군들에 해를 끼치다 918년에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 920년 골암진이 북적의 침략을 당하자 왕건은 유금필로 하여금 개정군 3천 명을 이끌고 가게 하였다. 유금필은 동산에 큰 성을 쌓고 북번의 추장 300명을 초대하여 복종을 받아냈다.
○ 936년 왕건은 유금필에게 흑수·달고·철륵 등 변방의 정예 기병 9천 5백 명을 지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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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高麗史(1451)
東女眞 登州
동여진이 등주를 침략하여 주진의 부락 30여 곳을 불태우자 장수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 登州는 921년에 達姑狄 171명이 신라를 치기위해 지나가려던 곳이다. 이로써 達姑狄은 東女眞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936년에 왕건은 유금필로 하여금 黑水·達姑·鐵勒의 기병을 지휘하게 하였다.
4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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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등주는 흑수를 막는 곳이었다
○ 921년에 달고적 171명이 신라를 침공하러 가다 등주에서 견권에게 패해 말 한 필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 1005년에 동여진이 등주를 침략하여 주진의 부락 30여 곳을 불태우자 장수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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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05 高麗史(1451)
東女眞 女眞 和州館
하공진과 유종을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화주관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으므로 함께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4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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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02 高麗史(1451)
30개 성씨는 아간돈(阿干頓), 니홀(尼忽), 니방고(尼方固), 문질로(門質老), 불차리(弗遮利), 거질아(居質阿), 점한일(黏閒逸), 니질아(尼質阿), 야라다(耶邏多), 요게라(邀揭囉) 요열일(要悅逸), 울언(鬱唁), 오림대(烏臨大), 몽골예(蒙骨拽), 훈저헌(暈底憲), 도태(徒怠), 야올일(耶兀逸), 나을신(拏乙信), 나을안(拏乙晏), 동골일(冬骨逸), 지도일(支闍逸), 어슬은(魚瑟殷), 마을일(麽乙逸), 도몰니(塗沒尼), 운돌리(云突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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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10 高麗史(1451)
▐ 1011년에 東北女眞의 추장 鉏乙豆가 무리 70인을 인솔하고 와서 토산물을 바친 바 있고 1912년에는 女眞 추장 麻尸底가 30개 성씨 부락의 자제를 인솔하고 와서 토종말을 바친 바 있다.
이로써 東北女眞의 鉏乙豆, 麻尸底 그리고 毛逸羅는 30개 성씨 부락이라는 동일 세력에 소속된 추장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11년과 1012년에 경주 일대를 침략했던 東女眞과는 다른 갈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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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03 高麗史(1451)
▐ 1011년에 東女眞의 배 1백여 척이 경주를 침략한 바 있고 1012년에도 東女眞이 청하현·영일현·장기현을 침략한 바 있다.
이 당시 왕고에 조공을 왔던 30개 성씨 女眞 부락과는 다른 세력으로 보이며 삼국지(289)에 배를 타고 다니면서 노략질을 잘 해서 이웃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다고 하는 挹婁를 연상시킨다. 발해는 옛 挹婁 지역에 定理府를 설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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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05 高麗史(1451)
▐ 1011년에 東女眞의 배 1백여 척이 경주를 침략하였고 1012년에 東女眞이 청하현·영일현·장기현을 침략하였으며 1015년에 女眞이 배 20척으로 구두포를 노략하였다. 과선을 바친 이 東女眞도 같은 세력으로 추정된다.
黑水靺鞨 蘇勿蓋는 1021년에 高之門과 함께 와서 토산물을 바친 바 있다. 따라서 그 즈음부터 이들은 침략을 멈추고 왕씨고려에 호의적으로 변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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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08 高麗史(1451)
女眞 將軍 阿豆閒 東蕃 子項史
제서를 내리기를,
“여진의 장군 아두한 등 340호가 내투하자 가주와 철주 땅에 억지로 머물게 하였으나, 아두한은 본래 동번의 자항사 종족이므로 마땅히 동번으로 보내 머물게 하라.”
라고 하였다.
▐ 가주와 철주는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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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10 高麗史(1451)
西女眞 大師 阿角八 東女眞 元甫 烏頭那
서여진의 대사 아각팔 등 14인과 동여진의 원보 오두나 등 63인이 내조하였다.
▐ 1020년에 黑水靺鞨 烏頭那 등 70여 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친 바 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東女眞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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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05 高麗史(1451)
三山村 中尹 夜西老 東蕃 黑水人 三十徒
지금 원수를 갚으려고 귀화한 삼산촌의 중윤 야서로 등 삼십도의 추장들(동번의 흑수인은 그 종족이 30이므로 삼십도라 부름)에게 알려 주었다.
▐ 1012년에 女眞의 추장 마시저가 30개 성씨 부락의 자제를 인솔하고 와서 토종말을 바친 적이 있다. 東蕃 黑水人도 女眞이라 불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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