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외세의 침공에 거듭 항복한 역사가 배어 있다.
아신왕은 광개토왕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개로왕은 장수왕의 군대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다.
맥인과 여진은 요흑사에 속한다.
요흑으로부터 잦은 침공을 받은 역사는 한국과 중국이 공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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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전망
가운데에 있는 높은 건물 왼쪽에 삼전도비가 있다. 인조가 여기에서 내려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禮)를 행한 곳이다. 오른쪽 가운데에 있는 산이 아차산이다. 장수왕의 장수가 그 아래서 개로왕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向王面三唾) 죽였다. 아차산 아래로 한강이 흐르는데, 건너면 바로 풍납토성이다. 아신왕이 광개토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跪王) 항복한 곳이다.
8496#8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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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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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동옥저
國小迫于大國之間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貊布魚鹽海中食物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婢妾遇之如奴僕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종속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포목·생선·소금·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8496#8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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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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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8496#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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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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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광개토왕릉비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과 예인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과 예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8496#8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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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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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9 三國史記(1145) 百濟 개로왕
고구려 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8496#8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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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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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9 三國史記(1145) 百濟 개로왕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已向王面三唾之乃數其罪縛送於阿且城下戕之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를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8496#8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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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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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6 日本書紀(720)
겨울 고려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창하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고려의 장수들이 왕에게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
8496#26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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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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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643 皇太極
至於朝鮮婦女軍士以力戰得之
今聞我國之婦女沃以熱水拷以酷刑既不容為妾又不留為婢妒忌殘虐莫此為甚
此等婦人朕必懲以從夫殉死之例法無可宥
조선의 부녀자는 병사들이 힘들게 싸워 얻은 것이다.
지금 들으니, 우리 나라 부녀자들이 뜨거운 물을 붇고 때리고 해서 첩이나 계집종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질투와 잔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이런 부인들은, 짐이 '남편을 따라 죽는 부인'의 예법으로 응징하고 용서치 않겠다.
8496#8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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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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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30 조선왕조실록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상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주서 각 1인을 거느리고, 세자는 시강원·익위사의 제관을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아갔다. 용골대 등이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나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8496#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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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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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30 조선왕조실록 1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8496#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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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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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30 조선왕조실록 3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주서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익위사의 제관을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이 황옥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을 치고 좌우에 옹립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왔다.
8496#5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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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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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30 조선왕조실록 4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 이하가 강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8496#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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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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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01.30 조선왕조실록 5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8496#5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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