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ian > 인물 > (ㅈ) > 전두환 > 2017 전두환 회고록 원본

○ 세상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광주□□ 개입 여부다. 이와 관련해서 전두환은 "5.18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banned"라고 표시된 것은 처음에 법원이 삭제하라고 한 부분이다. 신문에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해당 기사로 연결하였다. ○ 전두환 회고록 1권은 결국 출판이 금지되었다. 어떤 부분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두려워 출판을 금지했을까?
 
ᐥ전두환 회고록은 귀중한 역사자료ᐥ
최근 출간된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사이드웨이) 작가 정아은은 이 논픽션을 쓰면서 <전두환 회고록>과 <전두환 육성 증언>을 파고들었다. 책에 가장 많이 인용한 문헌이 이 두 책이다. 이렇게 요긴하게 인용되는 회고록을 출판금지시킨 것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겠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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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027 광주학살설
"더욱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 ▶최초의 집단발포는 폭도가 몰고온 버스에 경찰 4명이 깔려 죽은 다음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해 오는 버스 운전자를 계엄군이 사살한 데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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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027 광주학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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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027 전두환개입설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더욱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발포 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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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027 전두환개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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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031 정치자금
"대통령 재임 중 나의 책임 하에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모아 사용했고, 더욱이 퇴임하면서 상당액의 자금을 남겨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만큼 그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5.18특별법 재판과 병합된 재판에서 뇌물의 개념을 확대해석함으로써 내가 받은 자금은 모두가 뇌물이라는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나에게 원죄가 있는 만큼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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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031 정치자금↝
▐ 전두환이 재벌로부터 받은 돈은 정부로부터 부당한 혜택을 받는 댓가로 준 것이 아니라 안주면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바친 것이다. 뇌물이 아니라 강탈이며 재벌들로부터의 강탈은 별로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 돈을 공직자들에게 나눠줘서 부정부패를 줄인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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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035 주한미군 철수
▶카터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 한 배경에 대해 전두환의 인식은 일반적인 통설과 같다. 그러나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의 생태적 속성을 생각할 때 인권문제는 구실이고 속셈은 중국과의 거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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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140 미국정보기관 개입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에 정승화 총장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은밀하고 심도 있게 퍼지고 있는 소문은 미국 관련설이었다. 그런 소문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게 한 토양은 당시 악화될 대로 악화된 한미관계였다. 비록 우방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던 월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 정권을 CIA를 시켜 제거해버렸던 미국의 전례를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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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142 김재규와 미국
"공식 외교라인에 있지도 않은 김재규가 (1979년 6월 30일에 있었던) 정상회의 전후로 한 달 동안 글라이스틴 대사를 최소한 세 차례나 만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서울지부장도 김재규를 자주 만났다. 그러한 접촉을 통해 김재규로 하여금 미국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대통령을 버렸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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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292 김대중의 선동
"민주주의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슬로건이 아니라 진실이다." "혁명은 혁명을 낳고 우리 모두가 혁명가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 않게 김재규도 충신이다." "10.26사태는 독재에 항거한 전 국민의 혁명이다." "탄압을 받더라고 끈질기게 저항하면 10.26과 같은 또 다른 사태가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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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29 소련의 내심
미국의 저명한 군사외교 칼럼니스트인 잭 앤더슨은 1980년 3월 20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칼럼에서 "최신 정보를 다루는 전략 전문가들의 정보보고에 의하면 소련은 세계 전략의 하나로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을 공격하도록 함으로써 북한과 동맹관계에 있는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 와해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가 나던 해에 김일성이 전쟁을 하겠다고 했으면 소련은 기꺼이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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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31 서울의 봄
"20대 청년이 탈취한 버스를 몰고 진압경찰 대열로 미친 듯 돌진한 것이다. 그 버스에 치여 전경대원 다섯 명이 경찰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는데 그 중 한 명은 이튿날 새벽 끝내 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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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48-349 비상계엄 전국확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끝난 뒤 주영복 장관은 곧 회의 결과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보고했고, 오후 5시경 신 총리는 주영복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대동하고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정식으로 전국 비상계엄 선포를 건의했다. 훗날 최광수 비서실장이 검찰 답변에서 그 자리에 나도 참석했다고 진술한 것은 그날 내가 오전 10시, 그리고 오후 6시 30분 각각 대통령을 독대했던 사실을 혼동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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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48-349 비상계엄 전국확대
한 시간 정도의 논의가 끝난 후 최 대통령께서는 신 총리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하기 위한 국무회의를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날 밤 중앙청에서는 신현확 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가 열려 10.26 다음 날 선포된,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 비상계엄을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비상계엄으로 확대 시행하기로 의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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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79 직승기사격설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 ▶전두환 회고록의 광주□□ 부분은 1995년에 있었던 검찰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거기에는 직승기 사격에 의한 피해를 찾을 수 없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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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82 광주학살설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 ▶최초의 집단발포는 폭도가 몰고온 버스에 경찰 4명이 깔려 죽은 다음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해 오는 버스 운전자를 계엄군이 사살한 데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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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83 광주학살설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 ▶최초의 집단발포는 폭도가 몰고온 버스에 경찰 4명이 깔려 죽은 다음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해 오는 버스 운전자를 계엄군이 사살한 데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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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84 전두환개입설
"5.18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에 대한 조사는 여러 차례 이루어졌지만 전두환이 개입했다는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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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84 전두환개입설
"이 책에서 12.12와 5.17과 관련해서는 내가 했던 일과 알고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5.18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 내가 직접 겪은 사실들에 관한 내용은 매우 적다. 그 까닭은 다시 말하지만 5.18사태에 관해 내가 한 일, 직접 겪은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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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97 지역감정
"택시들을 보낸 뒤 다시 인도에 최초 대형으로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이기 시작하더니 경남 넘버를 단 12톤 정도의 트럭이 돌을 가득 실은 채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빵빵' 경적을 울렸는데 그 소리를 들은 시민들이 갑자기 격분하여 트럭 운전수를 끌어내어 발로 밟아..." _이OO 3여단 13대대 9지역대장: 1995.6.28. 진술조서, 5.18사건 검찰 수사기록 31,9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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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97 지역감정
"민간인 2명이 저에게 뛰어와 하는 말이 금남로 옆에 있는 길에서 시위대들 중에 메가폰을 든 사람이 '저기에 경상도놈 차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으니 경상도놈 죽여라' 하자 화염병이 날아와 차가 불타고 많이 두들겨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 보니 비키니 옷장을 실은 트럭 2대가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상태였었습니다." 장OO 11여단 61대대 정보장교: 1995.4.25 진술조서, 5.18사건 검찰수사기록 31,6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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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97 지역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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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98 계엄군의 출신지
"광주지역의 향토사단인 31사단에는 호남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또한 광주에 맨 처음 투입된 7공수여단도 전북 금마에 주동하고 있어서 부대원 중 40퍼센트가 호남 출신이었다. 순차적으로 광주에 증파된 공수부대들을 작전통제한 소준열 전교사령관과 정웅 31사단장도 호남이 고향이다. 소준열 장군은 전남 구례, 정웅 장군은 전남 순천 출신이다. 계엄사령부 작전참모부장으로서 광주 작전을 총괄한 김재명 장군도 바로 광주와 이웃한 전남 강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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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99-400 총기탈취
"5월 19일 오후 3시 30분경 시위대에 의해 MBC를 경비하던 31사단 병력이 M16소총 1정과 실탄 15발을 탈취당했다. 바로 다음날인 20일 밤 11시에는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세무서 별관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 17정을 탈취했다. 광주에서 무기가 대량으로 탈취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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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399-400 총기탈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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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18 자위권 발동
진종채 2군사령관은 5월 21일 오전 김준봉 작전참모를 대동하고 광주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갔다.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시민과 학생이 탈취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계엄군에게 총을 난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발표하면 진정이 될 것"이라면서 계엄사령관에게 자위권 발돌을 건의해줄 것을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요구했다고 진종채 사령관이 1심 21차 공판에서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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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광주□□
광장 중앙에 8t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사람이 몰려 웅성거렸다.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이었다. 폭도들이 운전사, 조수를 끌어내려 때리고 발로 차고 밟고 하여 두 사람이 현장에서 죽었다.
 
전두환 회고록 P419 자위권 발동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저녁 7시 30분경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지역 난동은 치안 유지를 매우 어렵게 하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서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한다."는 내용의 자위권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이어 19시 45분경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해 담화문 발표와 관련된 보고를 하고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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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21 자위권 천명
"국민들에 대한 경고적 의미 이외에 5월 20~21일 사이에 광주에서 발생한 총기, 탄약, 장비 등의 피탈과 관련하여 당시 자위권이 제대로 발동되었다면 그와 같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계엄군들이 자위권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서, 또는 자위권 자체를 몰라서 자위권을 발동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들에게 정당한 자위권 발동을 촉구하는 의미로 했던 것입니다." - 이희성 _1995.2.3. 피의자 신문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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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24 공수부대의 철수
이 사령관은 이어 오전 11시경 주영복 국방장관 주재로 합참의장, 해군총장, 공군총장 등이 참석한 국방부 대책회의에 참석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한 광주 소요사태 대응 방안을 보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1일 오후 4시 30분경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광주 시내의 전 계엄군을 광주의 외곽지대로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5월 22일 윤흥정 전교사령관을 교통부장관으로 기용하고 그의 후임으로 소준열 종합행정학교장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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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40 전두환개입설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재임 시 그 어떤 작전지휘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도 없다." ▶광주□□에 대한 조사는 여러 차례 이루어졌지만 전두환이 개입했다는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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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64 광주방문설
광주에 내려간 자체가 없는 나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있을 수 없고, 무엇보다 '나의 작전지휘를 받았어야 할' 현지 지휘관들 만큼은 나를 만났거나 봤어야 하는데 그런 증언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억지주장이 분명해지자 검찰은 금새 그 주장을 거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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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70 집단발포
"오후 1시경 시위대는 장형태 지사가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음에도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데 항의하면서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 측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원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대원들은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지부 건물 등으로 흩어졌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대원 2명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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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70 집단발포
▐ 이 부분은 전두환이 잘못 알고 있다. 갑작스런 화염병 공격을 받은 계엄군의 장갑차가 급히 후진하다 계엄군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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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70 집단발포
"이때 갑자기 시위대가 버스와 트럭으로 공수대원들을 향해 또다시 돌진해왔다. 차량들이 자신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자 장병들은 혼비백산했다. 다급한 상황에서 몇몇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했다. 이때 시위대 쪽에서도 총소리가 연발로 들렸고 62대대 이 모 대위의 얼굴을 탄환이 스쳐 지나갔다. 버스 운전자가 피격 사망하면서 버스는 도청건물 좌측을 들이받으며 정지했고 나머지 차들은 분수대를 돌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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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73 집단발포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발포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거나 광주 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 특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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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73 집단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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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76-477 총상분류
국방부는 검시결과에 따라 1985년 7월 '광주사태의 실상'이라는 제하의 자료에서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 128명 중 군이 보유한 M16에 의한 총상 사망자는 29명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나 1988년 2월 소준열 장군은 민족화해위원회에서 그 숫자를 45명이라고 증언하였고 1988년 7월 당시 오자복 국방장관은 국회 본회의 답변에서 98명이라고 번복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M16 총상 사망자가 96명, 카빈 총상 사망자는 26명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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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80 조비오
천주교의 조비오 신부도 명백히 광주 불로천변을 향해 헬기에서 드르럭 하는 소리를 내며 기총소사를 하는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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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80 조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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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80 직승기사격설
"피터슨 목사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당시 기총 소사 장면을 촬영한 것이라는 사진까지 제출했다. ... 그가 제시한 사진도 가짜였다. 목사라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가짜 사진까지 가져와서 허위 진술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피터슨 목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러한 거짓말을 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목사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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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80 직승기사격설
"이러한 주장(피터슨 목사와 조비오 신부의 직승기사격 목격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전두환 회고록의 광주□□ 부분은 1995년에 있었던 검찰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거기에는 직승기 사격에 의한 피해를 찾을 수 없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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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80 직승기사격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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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484 조비오 신부
"그러나 조비오 신부는 그 후에도 자신의 허위 주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미국인 목사라는 피터슨이나 조비오 신부나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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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04 현지 지휘관들의 책임
이광로 단장은 광주사태의 책임소재와 관련해, 현지 정부기관장들과 경찰의 책임도 가볍지만은 않지만, 전국 비상계엄령하에서 군병력의 운용과 지휘에 관한 사항인 만큼 상황이 그토록 악화된 것은 전적으로 현지 지휘관들의 책임이라면서 윤흥정 전교사령관과 정웅 31사단장의 군법회의 회부를 건의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의견은 다르다면서 이광로 단장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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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30 인민군개입설
"연고대생으로 소개됐다는 5~600명의 정체, 조직적으로 움직인 수백 명 규모의 집단이 실재했느냐의 여부, 복면한 사람들의 정체 그리고 5.18사태에 북한은 어느 정도 개입했었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 내가 이 글에서 확신을 갖고 새삼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주□□의 진압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고 광주의 보안 조직이 무너져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면 직승기 사격 여부도 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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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31 인민군개입설
"5·18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 ▶광주의 상황이 생생하게 김조의 통혁당 방송을 통해 나오는 것을 보면 시위대 속에 분명 간첩이 있었을 터인데 왜 잡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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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35 인민군개입설
"1950년 북한의 남침 때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무릅쓰며 싸웠던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었듯이 5.18사태 당시 정부와 계엄군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무장혁명 세력과 맞섰던 일도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정당하고도 불가피한 조치였음이 오래지 않아 명백히 밝혀질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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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35 인민군개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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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38 광주폭동론
광주사태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이 사건을 언급하는 외국 정부나 연구소, 언론은 'riot' 'uprising' 또는 'incident'라는 단어를 썼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영어 논문에서 광주사태를 가리키는 말로 'revolt(반란)'라는 단어를 썼다. 5.18단체의 영문 공식문서에도 'rebellion(반란)'이란 단어와 함께 이 단어를 쓰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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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41 지만원의 주장
"지만원박사는 5.18때 북한의 특수공작원으로 침투했다가 돌아가 그 뒤 북한의 정부와 군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수백 명의 인물을 사진분석을 통해 실명으로 밝히고 있고 그 내용이 특정 보도매체와 출판물, 인터넷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지만 주요 언론매체들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 ▶지만원의 인민군개입설을 소개하고 있을 뿐 그 주장에 대한 어떤 평가도 담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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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41 지만원의 주장
"독자나 시청자들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언론매체들, 여론의 향배를 좇을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계에서조차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어떠한 ‘수정주의적’접근도 금기되어 있는 것 같다.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은 뚜렷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 ▶현대사학자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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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541 지만원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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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P602 대통령이 되다
대다수 국민들은 "결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구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0.26이후 사람들은 집권 욕심에 혈안이 된 정치 지도자들의 폭주, 심각한 경제난, 학생들의 폭력시위, 노동계의 과격 투쟁, 북한의 도발 위협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정부를 보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황에 떠밀려 올라온 나를 보며 박수로 환영하지는 않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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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2
1981.02.05 동아일보 이낙연 기자1981.02.05 동아일보 이낙연 기자전두환 회고록 2 P307
 
¦전두환 회고록 관련 논쟁
2017.04.06 홍준표의 근거없는 추측2017.07.13 베스트셀러2017.08.06 광주지법 판결에 이의신청2017.08.07 조갑제의 어설픈 변호2017.08.07 조갑제의 허수아비치기2017.08.09 하태경의 헛다리짚기2017.08.17 출판·배포 감시2017.08.18 유시민과 박형준의 썰전2017.08.19 인세 회수2017.09.07 황석영의 카더라 논평2017.09.14 중앙일보 최경호2017.10.14 문제된 부분만 삭제 후 재출간2018.03.03 jtbc 손석희2018.10.15 경향신문 강현석2019.01.07 경향신문 강현석2019.02.17 중앙일보 최경호2019.11.11 뉴스1 전원2021.04.21 김일성 회고록 출간2021.04.22 하태경의 얄팍함2021.05.14 김일성 회고록 판매금지 신청 기각나무위키대한민국 헌법대한민국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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