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솔까 이야기 > 1530 황창랑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의 7세 소년 황창랑이 백제에 들어가 거리에서 칼춤을 추며 백제왕의 관심을 끌어 접근한 뒤, 백제왕을 죽이고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고 삼국사기에는 낙랑태수가 자객을 보내 백제왕을 죽이는 이야기와 신라의 소년 관창이 홀로 적진에 돌진하여 장렬히 전사한다는 이야기만 나온다. 황창랑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이 두 이야기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0300 삼국사기(1145)
기림왕 3년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낙랑은 313년에, 대방은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었다. 이때는 단지 망하기 직전에 있던 낙랑과 대방의 난민들이 신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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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 삼국사기(1145)
분서왕 7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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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의 신라 기원 이야기
수서에는 옥저로 쫓겨간 고려의 패잔병이 돌아가지 않고 남아 신라를 세웠다는 이야기에 덧붙여 신라의 왕이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싣고 있다. 삼국지에는 백제의 전신인 마한이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왕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바다로 도망가 마한을 쳐부수고 韓王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서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삼국지의 두 이야기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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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삼국사기(1145) 신라본기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 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모범이 되리라!”고 하였다. 관장이 “예!”라 하고는 갑옷을 입힌 말(甲馬)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달려 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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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삼국사기(1145) 열전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였다. 아버지 품일이 이르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다. 어찌 용기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관창이 “예.” 하고는, 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 들고 곧바로 적진을 공격하여 말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상대편의 수가 많고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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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 살 때에 백제의 시가에 들어가서 칼춤을 추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섰다. 백제의 임금이 듣고 그를 불러다 보고는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창랑은 기회를 타서 백제왕을 칼로 찔렀다.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탈을 만들어서 칼춤 추는 형상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탈춤이 전하고 있다.” 한다. 이첨(李詹 1345-1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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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속설에 의하면, 신라의 7세 소년 황창랑이 백제에 들어가 거리에서 칼춤을 추며 백제왕의 관심을 끌어 접근한 뒤, 백제왕을 죽이고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 신라인들이 이를 기려 황창랑의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온다. ● 이첨(1345~1405)은 황창이 관창의 와전일 것으로 추측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라의 소년이라는 공통점과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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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1888 임하필기(林下筆記 李裕元)
官昌訛誤黃昌郞... 관창이 황창랑으로 와전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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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동환록(東寰錄 尹廷琦)
황창은 낙랑국이 파견한 자객이다. 백제사에는 분서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서현을 빼앗자 낙랑태수가 자객을 보내어 분서왕을 죽였다고 한다. 여지승람과 김종직의 황창랑가에는 그것이 신라자객이라고 하나 그르다. ● 윤정기(1814~1879)는 낙랑태수가 자객을 보내 백제의 분서왕을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유사한 부분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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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국로추사(菊露秋寫 姜璘)
황창랑은 본래 신라인으로 낙랑에 망명했다. 백제에 들어가 검무를 추니 소문이 퍼져 분서왕 앞에서 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의 원수를 갚겠다며 분서왕을 찌르고 살해되었다. 분서왕은 곧 죽었다. ● 황창 이야기는 관창과 낙랑 자객의 이야기가 섞여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강린은 낙랑자객설을 본으로 하되 관창 이야기의 요소까지 가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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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별건곤 제59호 朝鮮刺客列傳
신라 흘해왕 7년(316) 백제가 신라와 속지 악랑(악랑은 원래 고구려에 속하얏다가 신라 기림왕 3년에 대방과 가티 귀복하얏다)의 서현을 음습하야 빼아스니 악랑 태수가 크게 분한하야 그 보복을 하랴고 여러 가지로 게책을 생각하다가 최후에 자객 황창랑을 뽑아 보냇스니 황창랑은 원래 악랑 사람으로 검술의 천재가 잇서서 여덜 살 때부터 칼춤을 잘 추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비분강개한 의협심이 만어 자긔 생명을 초개 가티 녁이는 용소년이엿다. ● 낙랑자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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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삼천리 제12권 제7호
백제에는 계백이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 그러니까 싸우는 대로 신라를 이긴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 한 대신이 아뢰기를, 「죽기를 무서워하지 아니하는 장수 한 사람만 있으면 백제를 막을 수 있소」 하였습니다. 이 때에 어떤 소년 하나가 「신이 나가 죽겠소」 하고 나섰습니다. 다들 돌아보니 그는 아직 얼닐곱살밖에 아니 된 화랑(花郞) 황창랑(黃倡郞)이었습니다. ● 관창과 황창랑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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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이야기 삼국야사(김형광)
낙랑 태수는 자기 딸이 백제 분서왕의 습격으로 살해되자 사위 보육을 신라로 보내어 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거절하자 보육은 칼춤을 잘 추는 황창랑을 데리고 돌아온다. 그리고 낙랑 태수와 계획 끝에 황창랑을 백제에 자객으로 보내어 분서왕을 죽이게 한다. 그리고 황창랑에게 제공하기로 했던 도주로를 제공하지 않아 황창랑이 죽임을 당하게 만든다. ● 강린의 낙랑자객설과 줄거리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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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倡舞’ 硏究 - ‘黃倡’의 由來문제를 中心으로
Ⅰ. 머리 Ⅱ. 創作假面劍舞로서의 黃倡舞 Ⅲ. 黃倡舞의 歷史的 形成動因 Ⅳ. 黃倡談의 실체와 中國流傳 Ⅴ. 黃倡談과 官昌談의 관련성 문제 Ⅵ.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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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무
한국의 검무는 신라 시대(서기 667년경)에 황창랑(黃昌郎)이 지은 것이라고 <동경잡기> <풍속조(風俗條)>와 <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황창랑이란 7세(8세)의 소년이 검무(劍舞)를 빙자하여 백제왕을 척살하고 백제인들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신라사람들이 이를 슬피 여겨, '소년의 얼굴을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춘 것'이 지금껏 전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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