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관여설은 대통령-계엄사령관-계엄군으로 이어지는 지휘계통 바깥의 전두환이 광주□□의 진압에 관여하였다는 주장으로 암매장설과 결합하여 전두환을 학살자로 부르게 한다.
그러나 지난 30여년간 집요하게 뒤져 왔지만 전두환이 광주□□의 진압에 관여한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전두환관여설에 기반한 투쟁 세력은 전두환에게 사과를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증거를 찾지 못한 경찰이 자백에 매달리는 것과 같았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광주□□
광장 중앙에 8t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사람이 몰려 웅성거렸다.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이었다. 폭도들이 운전사, 조수를 끌어내려 때리고 발로 차고 밟고 하여 두 사람이 현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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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대통령 - 계엄사령관 - 2군사령관 - 전남북계엄분소장으로 이어지는 지휘 계통에 보안사령관 겸 정보부장 서리인 전두환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된 이유는 그가 군의 실력자였고 김대중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경쟁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두환이 군의 실력자이긴 했지만 광주□□의 진압에 관여한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3279#9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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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5.21 2군사령부 문서
▶전교사령관은 08시에 발포가 가능한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2군사령관에게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2군사령관은 계엄사령관을 만나 이를 전달하였고 계엄사령관은 전두환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이를 논의하였다. 2군사령부 문서에 "全 閣下: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된 손글씨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회의 이전에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과 발포명령은 연결되지 않는다.
3279#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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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5.23 2군사령부 문서
▶2군사령관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보고하는 회의에 전두환도 참석하였다. 각하가 "Good idea"라고 했다는 손글씨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24일 오전 2시 실시될 예정이었던 이 작전은 미국의 요청으로 국방부 장관이 지침을 내려 25일 오전 2시 이후로 연기하였다. 작전의 최종 결정권이 전두환이 아닌 미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79#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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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1 천금성
(5월 22일) 육군 전투병과교육사령관으로 소준열 소장이 새로이 부임했다. 소준열 사령관은 정호용 사령관과 머리를 맞댔다. 그러나 현지로 내려온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절대로 군사작전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계엄군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작전을 하면 대단한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좀 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고 말렸다.
▐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했다는 주장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3279#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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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2 허장환
505보안부대 허장환 중사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를 다녀간 날 밤 자위력 구사라는 미명 하에 발포명령이 내려졌다는 말을 상관인 S 중령에게 직접 전해 듣고 실탄을 받았다. '우리가 먼저 한 것으로 해서는 안 돼'라는 말도 이어졌다. 모든 문제는 사령관이 책임진다는 말도 S 중령에게서 나왔다.
▐ 양심선언의 형태로 제기되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허장환은 2020년 지금도 비슷한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3279#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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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검찰
"광주에 내려간 자체가 없는 나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있을 수 없고, 무엇보다 '나의 작전지휘를 받았어야 할' 현지 지휘관들 만큼은 나를 만났거나 봤어야 하는데 그런 증언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억지주장이 분명해지자 검찰은 금새 그 주장을 거둬들였다."
▐ 허장환의 주장은 이미 1995년에 검찰이 대대적으로 파헤치다 포기한 주장이다.
3279#5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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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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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이희성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사실상 군권을 장악해 군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직접 제가 진압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관여해 간섭한 사실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보안사 지휘계통을 통하거나 육본 참모들을 통해 광주사태 진압 과정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3279#9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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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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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6 이희성
○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3279#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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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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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김용장
자칭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은 손석희의 방송에 나와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점심때에 직승기를 타고 광주전투비행단에 와서 정호용 및 이재우와 회합하고 돌아갔는데 그 직후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때 발포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본국에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 김용장은 훗날 미군 정보요원이 아니며 그가 올렸다는 보고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3279#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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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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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8 허화평
윤흥정 전교사령관, 장사복 전교사참모장, 이재우 광주지역 보안부대장은 모두 전두환 편이 아닌데도 허장환이 제기한 의혹을 놓고 이루어진 조사에서 모두 전두환의 광주방문을 부정하였다.┆정보기관의 수장은 원래 현장을 방문하지 않는다.┆전두환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엄사령관과 대통령을 보좌하느라 광주에 내려갈 여유도 없었다.
3279#6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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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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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노영기
○ 18일 11시 40분부터 7공수 33대대가 출동예정에 들어갔다. 정식 명령 계통은 전교사-31사단-7공수지만 이 출동 예정 명령은 보안사 문서에만 보인다.
○ 7공수가 광주 시내에 투입되기 전인 18일 오전에 11공수의 광주 파병이 결정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 계엄사에서 작전명령서를 작성하던 19일 21시에 3공수는 광주 출동 준비 명령을 접수했다. 19일 04시부로 광주지역 공수부대의 작전지휘권이 31사단 96연대장에서 11공수여단장으로 바뀌었다
3279#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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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기와 강현석
“전 전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 직후 첫 지방 방문지로 광주를 선택한 것은 정치적 부담인 5·18을 서둘러 덮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학살 주범인 그가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론하지 말라’며 정권 초부터 족쇄를 채우려 했다”고 분석했다.
▐ 광주사태에 전두환이 개입했다는 근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학살 주범'이란 표현은 명예훼손이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조비오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했지 '가면을 쓴 사탄'이라 하지 않았다.
3279#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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