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44 ❰❰ 0246.08 「三國誤記」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만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기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이를 패배시켜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이었다. 또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인이었다. 왕이 철갑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인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를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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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 0246.10 「三國誤記」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자 동천왕은 남옥저 쪽으로 달아났는데 왕기가 쫓아왔다. 죽령에 이르러서는 군사들이 거의 다 흩어졌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위군을 막아 동천왕의 도주를 도왔다. 전장에 쓰러진 밀우는 유옥구가 구출해왔다. 동천왕이 남옥저에 이르자 유유가 위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 위군의 장수에게 접근하여 그를 죽였다. 이때 혼란에 빠진 위군을 동천왕이 공격하자 마침내 위군은 낙랑에서 퇴각하였다.┆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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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7 「三國誤記」 ❹平壤¹城
동천왕이 丸都城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平壤¹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平壤²은 본래 仙人 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여기에 나오는 平壤¹을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으로 오인하고 왕검 설화를 붙여 놓았다. 당시 대동강 유역에는 낙랑군이 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平壤¹은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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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1 ❰❰ -0020 「三國誤記」 新羅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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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3.07 ❰❰¹ 0233 「三國誤記」 于老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伊湌 干老가 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 292년에도 왜인이 사도성을 공격해와 장수를 보내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293년 2월에는 사벌주의 80가구를 사도성으로 이주시킨 바 있다. 233년의 이 기록을 60년 뒤로 물리면 해를 이어 왜인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되어 자연스러워진다.
┆291➔293 304 305 309.01 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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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5 ❰❰¹ 0245 「三國誤記」 于老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于老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태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병사들이 감격하였다.
▐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접한 것은 동유낙랑이 망한 337년 이후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는 훗날 고구려에 통합되는 동유낙랑일 가능성이 있다.
┆291 293 304➔305 309.01 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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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6 ❰❰ 0006 「三國誤記」 百濟
왕이 熊川柵을 세우자 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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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9 ❰❰ 0253 「三國誤記」
우로가 왜국의 사신 갈나고를 접대하며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를 듣고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치니 우로가 "내가 당해내겠다"하고 왜군에게로 갔다. 왜인이 잡아서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미추왕 때에 왜국의 대신이 왔는데 우로의 아내가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죽였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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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0 ❰❰² 0190 「三國誤記」 仇道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232 245 248 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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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2 ❰❰ 0032 「三國誤記」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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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7 ❰❰ 0037 「三國誤記」 新羅
髙句麗王無恤 襲樂浪²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304년, 314년 그리고 336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337년에 고구려에 망해 신라로 투항한 낙랑은 樂浪郡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樂浪²으로만 설명이 된다.
또 332년에 고구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병합되었다는 낙랑과도 연결되어, 그 병합이 337년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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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0 ❰❰ 0040 「三國誤記」 新羅
화려현과 불내현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渠帥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337년에 樂浪²이 맥고려에 병합되면서 기록에서 東有樂浪이 사라지고 340년부터 貊國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樂浪²이 貊國이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정황으로 보아 위치도 樂浪²과 어울린다. 맥고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貊國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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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10 「三國誤記」 ❼國內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²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²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遷都於國内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고국원은 서천왕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환도성 인근에 있었다. 따라서 이때 도읍을 다시 환도성 인근으로 옮겼다고 해야 앞뒤로 이어지는 기록과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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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87 ❰❰⁵ 0087 「三國誤記」 新羅
영을 내려 말하기를 “짐이 부덕함에도 이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百濟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南加耶와 접해 있다. 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벽과 보루를 잘 수리하여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달에 加召城과 馬頭城 두 성을 축조하였다.
▐ 10년 전에 남가라와 전쟁을 했고 여기서도 신라의 남쪽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加耶는 南加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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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5 ❰❰ 0392 「三國誤記」
夏五月王薨葬於故國壤號為故國壤王
여름 5월에 왕이 서거하여 고국양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양왕이라 하였다.
┆고국양왕은 384년에 즉위하였으니 고국양왕 9년은 392년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永樂五年歲在乙未(영락5년은 395년)와 以六年丙申(6년은 396년)에 의해 광개토왕의 즉위년인 영락 1년은 辛卯年(391년)이다.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없으므로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고국양왕 9년의 기록으로 잘못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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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2 ❰❰ 0529 「三國誤記」 日本書紀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수적압산신에게 “무릇 조공하는 사자는 늘 바다 가운데의 굽은 섬을 피하느라 매번 풍파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가라의 ❷多沙津을 신들이 조공하는 나루터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압산신이 듣고 아뢰었다.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 진은 官家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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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42.10 「三國誤記」 高麗史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 전쟁을 불러올 정도의 도발인데 거란의 보복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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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4 「三國誤記」 金史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新羅來 年已六十餘矣 금시조는 이름이 함보인데 신라에서 나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 금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나라에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송막기문(1156)에 신라인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는 신라가 고려로 바뀐 지 200여년 후의 시점에서 금나라가 자신들의 시조를 신라인으로 인식하였다는 뜻이다. 이후 원나라가 금사(1344)를 편찬할 때까지 200여년간 모든 사서에서 신라인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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