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 「三國誤記」 新羅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 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시조의 이름은 혁거세이다. -57년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에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신라왕의 성이 처음 나타난 것은 521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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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4 「三國誤記」 新羅
辛丑朔 +漢 日有食之 신축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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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9.03 「三國誤記」 新羅
春三月 +漢 有星孛于王良 봄 3월에 한나라에서 살별이 왕량 자리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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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4.04 「三國誤記」 新羅
夏四月 +漢 有星孛于參 여름 4월에 한나라에서 살별이 삼 자리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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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7 「三國誤記」 高句麗
始祖(東明聖王→)鄒牟王 姓髙氏✘ 시조는 추모왕이다.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동명은 부여의 시조고 고구려의 시조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추모왕으로 나온다. 고씨 성은 407년 이전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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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4.06 「三國誤記」 新羅
壬申晦 +漢 日有食之 임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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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8.04.30 「三國誤記」 新羅
己亥晦 +漢 日有食之 기해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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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6.08 「三國誤記」 新羅
乙卯晦 +漢 日有食之 을묘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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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5.02 「三國誤記」 新羅
乙酉晦 +漢 日有食之 을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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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4 「三國誤記」 新羅
(春二月己酉→)春三月己酉 +漢 星孛于河皷 기유일에 한나라에서 하고 자리에서 살별이 나타났다.┆三月을 二月로 잘못 옮겨 적었다. 이 해의 2월에는 己酉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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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2.01.01 「三國誤記」 新羅
辛丑朔 +漢 日有食之 신축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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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2.09 「三國誤記」 新羅
戊申晦 +漢 日有食之 무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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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6 「三國誤記」 新羅
冬十月丙辰朔 +漢 日有食之 겨울 10월 병진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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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2 「三國誤記」 高句麗
尤誘(我將延丕→)我侯騶靳之 엄우가 우리 후 추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 ┆한서(82), 삼국지(289) 그리고 후한서(445)에 모두 고구려후 騶 또는 騊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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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16 「三國誤記」 新羅
秋七月戊子晦 +漢 日有食之 무자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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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3 「三國誤記」 新羅
秋 +漢 大白入大微 가을에 한나라에서 금성이 태미 자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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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0 ❰❰ 0044 「三國誤記」 高句麗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낙랑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한 토착인 왕조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낙랑군과 동유낙랑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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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9 「三國誤記」 高句麗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大原➔烏桓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오환이 우북평, 어양, 상곡 그리고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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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4.02 「三國誤記」 新羅
春二月 +漢 星孛于紫宫 봄 2월에 한나라에서 자궁 자리에서 살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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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55 「三國誤記」 高句麗
築遼西十城以備漢兵✘ ┆당시는 요동군이 건재하던 때라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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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60.06 ❰❰ 0059.06 「三國誤記」 新羅
六月 +漢 有星孛于天舩 6월에 한나라에서 천선 자리에 살별이 나타났다.┆후한서(445)에는 60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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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85.04 「三國誤記」 新羅
夏四月 +漢 客星入紫微 여름 4월에 한나라에서 객성이 자미 자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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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4.09 「三國誤記」 新羅
秋九月庚申晦 +漢 日有食之 가을 9월 경신 그믐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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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7.07 「三國誤記」 新羅
秋七月甲戍朔 +漢 日有食之 가을 7월 갑술 초하루에 한나라에서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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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91 「三國誤記」 新羅
秋九月 +漢 蚩尢旗見于角亢 가을 9월에 한나라에서 치우기가 각수와 항수 자리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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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91 「三國誤記」 百濟
秋九月 +漢 蚩尤旗見于角亢 가을 9월에 한나라에서 치우기가 각과 항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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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三國誤記」 蓋馬大山 後漢書註
其山在今平壤城(西→)東 개마대산은 지금 평양성의 동쪽에 있다.┆삼국지(289)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이 있었고 조선의 동쪽에 예가 있었으며 예의 북쪽에 고구려와 옥저가 있었는데,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다. 평양성은 조선에 있었으니 개마대산은 그 동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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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三國誤記」 險瀆 應劭註
險瀆(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朝鮮(故王險也 燕人滿者渡浿水王之都 天子募罪人擊朝鮮 孫右渠發兵距險) 조선(옛 왕험이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를 건너 그곳에 도읍하였다. 천자가 죄수를 모아 조선을 공격하자 손자 우거가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 주둔하였다.)┆險瀆과 王險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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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三國誤記」 險瀆 臣瓚註
(險瀆→)朝鮮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朝鮮也 조선(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이다.)┆險瀆과 王險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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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三國誤記」 險瀆 師古註
險瀆 瓚說(是→)非也 험독(신찬은 틀렸다.)┆臣瓚은 險瀆과 王險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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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0 「三國誤記」 險瀆 後漢書註
(險瀆→)朝鮮 史記曰王險衞滿所都 조선(사기에서는 왕험을 위만이 도읍한 곳이라고 했다.)┆險瀆과 王險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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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33 ❰❰¹ 0173 「三國誤記」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60년 물리면 삼국지(289)에서 말하는 왜국대란이 끝난 직후가 되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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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39.06 ❰❰ 0238 「三國誤記」 三國志
景初(二年→)三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239년 6월에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으로 하여금 군에 이르게 하여 천자에게 나아가서 조헌하기를 요청하므로 태수인 유하가 관리를 시켜서 전송하게 하여 경도에 이르게 하였다. ▐ 日本書紀에 인용된 魏志와 梁書는 모두 3년으로 되어 있고 공손연이 토벌된 것도 3년이므로 왜왕이 조공을 바칠 여건도 이때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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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39.12 ❰❰ 0238 「三國誤記」 三國志
其年十二月 詔書報倭女王曰 制詔親魏倭王卑彌呼 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 次使都巿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 女生口六人 班布二匹二丈 以到 그해 12월에 조서를 내려서 왜의 여왕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친위왜왕 비미호에 제조하노라. 대방군 태수인 유하가 사인을 보내어 너의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해 왔는데 네가 바친 남자 생구 4인, 여자 생구 6인 그리고 반포 2필 2장을 받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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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4 ❰❰ 0246.08 「三國誤記」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만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기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위에서 이를 패배시켜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이었다. 또 양맥의 골짜기에서 패배시켰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인이었다. 왕이 철갑기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므로 크게 패배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인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기를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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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 0246.10 「三國誤記」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자 동천왕은 남옥저 쪽으로 달아났는데 왕기가 쫓아왔다. 죽령에 이르러서는 군사들이 거의 다 흩어졌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위군을 막아 동천왕의 도주를 도왔다. 전장에 쓰러진 밀우는 유옥구가 구출해왔다. 동천왕이 남옥저에 이르자 유유가 위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 위군의 장수에게 접근하여 그를 죽였다. 이때 혼란에 빠진 위군을 동천왕이 공격하자 마침내 위군은 낙랑에서 퇴각하였다.┆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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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¹ 0185 「三國誤記」 新羅
파진찬 仇道와 일길찬 仇須兮를 좌·우軍主로 임명하여 召文國을 공격하였다. 軍主라는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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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7 「三國誤記」 ❹平壤¹城
동천왕이 丸都城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平壤¹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平壤²은 본래 仙人 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여기에 나오는 平壤¹을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으로 오인하고 왕검 설화를 붙여 놓았다. 당시 대동강 유역에는 낙랑군이 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平壤¹은 대동강변에 있는 平壤²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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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8 ❰❰¹ 0188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母山城을 공격해 오자, 파진찬 仇道에게 병사를 내어 백제군을 막도록 명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263
 0249 ❰❰¹ 0189 「三國誤記」 新羅
仇道가 拘壤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기고, 5백 여 명을 죽였다.
http://qindex.info/i.php?x=1262
 0262 ❰❰ -0039 「三國誤記」 新羅
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http://qindex.info/i.php?x=2198
 0269 ❰❰ 0209 「三國誤記」 新羅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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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1 ❰❰ -0020 「三國誤記」 新羅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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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1 ❰❰ -0020 「三國誤記」 新羅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이에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의 난리에 고통을 겪다가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거처를 정하고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점차 강성해졌다. 이런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 책망이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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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2 ❰❰ -0019 「三國誤記」 新羅
馬韓王이 죽었다. 혹자가 왕에게 설득하기를, “西韓의 왕이 지난번 우리 사신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정벌하면 넉넉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삼는 것은 어질지 않은 일이다.”라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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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4 ❰❰ -0017 「三國誤記」 百濟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20
 0284 ❰❰¹ 0224.07 「三國誤記」 新羅
이벌찬 연진이 烽山 아래에서 백제와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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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84 ❰❰¹ 0224.08 「三國誤記」 新羅
烽山城을 쌓았다.
http://qindex.info/i.php?x=30072
 0285 ❰❰ -0016 「三國誤記」 百濟
靺鞨²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http://qindex.info/i.php?x=16821
 0285 ❰❰ -0016 「三國誤記」 百濟
靺鞨²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http://qindex.info/i.php?x=16986
 0286 ❰❰ -0015 「三國誤記」 百濟
遣使樂浪²修好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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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0.02 ❰❰ -0011 「三國誤記」 百濟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16822
 0290.07 ❰❰ -0011 「三國誤記」 百濟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²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²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http://qindex.info/i.php?x=16929
 0291.07 ❰❰¹ 0231 「三國誤記」 于老
伊湌 于老를 대장군에 임명하여 甘文國을 공격해 격파하고 그 땅을 郡으로 만들었다. ┆➔291 293 304 305 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16687
 0292 ❰❰ -00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http://qindex.info/i.php?x=16823
 0292 ❰❰² 0172 「三國誤記」 仇道
仇道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仇須兮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92 305 308 309 310
http://qindex.info/i.php?x=29986
 0293 ❰❰ -0008 04 「三國誤記」 百濟
樂浪²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http://qindex.info/i.php?x=29718
 0293 ❰❰ -0008 07 「三國誤記」 百濟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²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http://qindex.info/i.php?x=16883
 0293.07 ❰❰¹ 0233 「三國誤記」 于老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伊湌 干老가 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 292년에도 왜인이 사도성을 공격해와 장수를 보내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293년 2월에는 사벌주의 80가구를 사도성으로 이주시킨 바 있다. 233년의 이 기록을 60년 뒤로 물리면 해를 이어 왜인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되어 자연스러워진다. ┆291➔293 304 305 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558
 0295.05 ❰❰ -0006 「三國誤記」 百濟
“國家東有樂浪² 北有靺鞨² 侵軼疆境 少有寧曰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http://qindex.info/i.php?x=5794
 0295.07 ❰❰ -0006 「三國誤記」 百濟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戸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들을 옮겼다.
http://qindex.info/i.php?x=5996
 0295.08 ❰❰ -0006 「三國誤記」 百濟
遣使馬韓 告遷都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http://qindex.info/i.php?x=6027
 0296 ❰❰ -0005 「三國誤記」 新羅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曰 寡君問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저희 왕께서 남쪽의 한에서 성인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으셨기에 신으로 하여금 와서 선물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25
 0296 ❰❰ -0005 「三國誤記」 百濟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 주민을 이주시키다.
http://qindex.info/i.php?x=16923
 0299 ❰❰ -0002 「三國誤記」 百濟
樂浪²이 쳐들어와서 慰禮城을 불태웠다.
http://qindex.info/i.php?x=16816
 0300 ❰❰¹ 0240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52
 0300.10 ❰❰ -0001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素牟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http://qindex.info/i.php?x=5984
 0300.11 ❰❰ -0001 「三國誤記」 百濟
王欲襲樂浪²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http://qindex.info/i.php?x=16886
 0301 ❰❰¹ 0261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http://qindex.info/i.php?x=29958
 0301 ❰❰⁴ 0061 「三國誤記」 新羅
馬韓의 장군 맹소가 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 마한의 멸망 시기보다 52년 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다. 마한의 멸망 시기보다 60년 덜 옮겨 8년 앞서게 했다. 그러면 마한이 망하기 전에 항복한 것이 되어 자연스럽다.
http://qindex.info/i.php?x=16682
 0303.10 ❰❰⁴ 0063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백제 왕이 땅을 넓혀 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303 304.08 304.10 306 315 316 ▐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만나는 최초의 사건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의 분쟁에 관한 기록은 모두 303년 이후로 물려야 한다.
http://qindex.info/i.php?x=30150
 0304 ❰❰ 0004.09 「三國誤記」 百濟
왕이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나 한 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http://qindex.info/i.php?x=16827
 0304 ❰❰¹ 0244 「三國誤記」 于老
伊湌 于老를 舒弗邯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291 293➔304 305 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29832
 0304.07 ❰❰ 0004.07 「三國誤記」 新羅
樂浪²兵이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16828
 0304.08 ❰❰⁴ 0064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백제가 군사를 보내 蛙山城을 공격하였다. ┆303➔304.08 304.10 306 315 316
http://qindex.info/i.php?x=30151
 0304.10 ❰❰⁴ 0064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다시 狗壤城을 공격하자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공격해 패주시켰다. ┆303 304.08➔304.10 306 315 316
http://qindex.info/i.php?x=30152
 0305 ❰❰² 0185 「三國誤記」 仇道
파진찬 仇道와 일길찬 仇須兮를 좌·우軍主로 임명하여 召文國을 공격하였다. 軍主라는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292➔305 308 309 310
http://qindex.info/i.php?x=29987
 0305 ❰❰¹ 0245 「三國誤記」 于老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于老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태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병사들이 감격하였다. ▐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접한 것은 동유낙랑이 망한 337년 이후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는 훗날 고구려에 통합되는 동유낙랑일 가능성이 있다. ┆291 293 304➔305 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29833
 0306 ❰❰ 0006 「三國誤記」 百濟
왕이 熊川柵을 세우자 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http://qindex.info/i.php?x=6000
 0306 ❰❰⁴ 0066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해 함락하고서 2백 인을 남겨 머물러 지키게 했으나, 얼마 안 가 이를 회복했다. ┆303 304.08 304.10➔306 315 316
http://qindex.info/i.php?x=30153
 0308 ❰❰² 0188 「三國誤記」 仇道
백제가 母山城을 공격해 오자, 파진찬 仇道에게 병사를 내어 백제군을 막도록 명하였다. ┆292 305➔308 309 310
http://qindex.info/i.php?x=29983
 0308.07 ❰❰ 0008 「三國誤記」 百濟
왕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http://qindex.info/i.php?x=16911
 0308.10 ❰❰ 0008 「三國誤記」 百濟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馬韓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國邑을 병합하였다. 오직 圓山과 錦峴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http://qindex.info/i.php?x=6001
 0309 ❰❰ 0253 「三國誤記」
우로가 왜국의 사신 갈나고를 접대하며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를 듣고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치니 우로가 "내가 당해내겠다"하고 왜군에게로 갔다. 왜인이 잡아서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미추왕 때에 왜국의 대신이 왔는데 우로의 아내가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죽였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7474
 0309 ❰❰² 0189 「三國誤記」 仇道
仇道가 拘壤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기고, 5백 여 명을 죽였다. ┆232 245 248➔249 250
http://qindex.info/i.php?x=29988
 0309.01 ❰❰¹ 0249 「三國誤記」 于老
첨해왕이 왕위에 있을 때,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속해 있던 沙梁伐國이 홀연 배반하고 백제에 귀의하였다. 昔于老가 병사를 거느리고 가 토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291 293 304 305➔309.01 309.04
http://qindex.info/i.php?x=30100
 0309.04 ❰❰ 0009 「三國誤記」 百濟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http://qindex.info/i.php?x=6002
 0309.04 ❰❰¹ 0249 「三國誤記」 于老
왜인이 서불한 于老를 죽였다. ┆291 293 304 305 309.01➔309.04
http://qindex.info/i.php?x=32754
 0309.07 ❰❰ 0009 「三國誤記」 百濟
大豆山城을 쌓았다.
http://qindex.info/i.php?x=2199
 0309.07 ❰❰² 0189 「三國誤記」
母山城-拘壤-圎山郷-缶谷城-蛙山┆仇道가 拘壤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기고, 5백 여 명을 죽였다. ┆308➔309 310
http://qindex.info/i.php?x=30149
 0310 ❰❰² 0190 「三國誤記」 仇道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232 245 248 249➔250
http://qindex.info/i.php?x=29985
 0314 ❰❰ 0014 「三國誤記」 新羅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6부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막게 하였다. 樂浪²이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http://qindex.info/i.php?x=16936
 0315.09 ❰❰¹ 0255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침략해 왔다. 일벌찬 익종이 槐谷 서쪽에서 맞서 싸우다가 적군에 살해되었다.
http://qindex.info/i.php?x=29953
 0315.10 ❰❰¹ 0255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烽山城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54
 0315.10 ❰❰⁴ 0075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303 304.08 304.10 306➔315 316
http://qindex.info/i.php?x=30154
 0316 ❰❰ 0016 「三國誤記」 百濟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牛谷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http://qindex.info/i.php?x=6025
 0316 「三國誤記」 宋書
(高驪→)慕容略有遼東 (百濟→)段略有遼西 (百濟→)段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北平郡北平縣 모용부 선비가 요동을 점유하자 단부 선비는 요서를 점유하였다. 단부 선비는 치소를 두고 북평군 북평현이라 하였다. ▐ 서진 말기에 모용부가 창려, 요동 등 평주를 장악하고 단부가 요서, 북평 등 유주를 장악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651
 0316 「三國誤記」 晉書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遂城을 武遂와 혼동했다.
http://qindex.info/i.php?x=16652
 0316.09 ❰❰⁴ 0076 「三國誤記」
娘子谷城-蛙山城-狗壤城┆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을 되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303 304.08 304.10 306 315➔316
http://qindex.info/i.php?x=30155
 0316.10 ❰❰ 0016 「三國誤記」 百濟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牛谷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http://qindex.info/i.php?x=1259
 0318.08 ❰❰ 0018 「三國誤記」 百濟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古沙夫里城을 쌓았다.
http://qindex.info/i.php?x=1260
 0322 ❰❰ 0022.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述川城을 쳐들어왔다.
http://qindex.info/i.php?x=2814
 0322 ❰❰ 0022.11 「三國誤記」 百濟
또 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랜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31
 0323 ❰❰¹ 0263 「三國誤記」 新羅
왕이 직접 국조묘에서 제사를 주관하고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仇道를 葛文王으로 추봉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97
 0325 ❰❰ 0025 「三國誤記」 百濟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欵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가가 부양으로 와서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32
 0326 ❰❰¹ 0266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烽山城을 공격하자, 성주 직선이 용맹한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우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왕이 그 일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사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
http://qindex.info/i.php?x=29959
 0330 ❰❰ 0030 「三國誤記」 百濟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x=16833
 0330 ❰❰ 0030 「三國誤記」 百濟
동부의 흘우가 말갈과 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x=29755
 0330 「三國誤記」 新羅→百濟
처음으로 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http://qindex.info/i.php?x=40718
 0331 ❰❰ 0031 「三國誤記」 百濟
高木城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http://qindex.info/i.php?x=16834
 0332 ❰❰ 0032 「三國誤記」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http://qindex.info/i.php?x=16887
 0332 ❰❰ 0032.04 「三國誤記」 高句麗
或云 欲滅樂浪 遂請㛰 娶其女爲子妻 後使歸夲囯 壞其兵物 혹은 '낙랑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http://qindex.info/i.php?x=21120
 0332 ❰❰ 0032.11 「三國誤記」 高句麗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이 자결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1121
 0334 ❰❰ 0034.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http://qindex.info/i.php?x=16835
 0334 ❰❰ 0034.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또 甁山柵을 습격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36
 0336 ❰❰³ 0156 「三國誤記」
鷄立嶺路를 개척하였다.
http://qindex.info/i.php?x=30109
 0336 ❰❰ 0036 「三國誤記」 新羅
樂浪²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http://qindex.info/i.php?x=16927
 0337 ❰❰ 0037 「三國誤記」 新羅
髙句麗王無恤 襲樂浪²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304년, 314년 그리고 336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337년에 고구려에 망해 신라로 투항한 낙랑은 樂浪郡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樂浪²으로만 설명이 된다. 또 332년에 고구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병합되었다는 낙랑과도 연결되어, 그 병합이 337년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http://qindex.info/i.php?x=16838
 0338 ❰❰³ 0158 「三國誤記」
竹嶺을 개척하였다.
http://qindex.info/i.php?x=30110
 0338 ❰❰¹ 0278 「三國誤記」 新羅
백제군이 쳐들어와 槐谷城을 포위하자, 왕이 파진찬 정원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61
 0340 ❰❰ 0040 「三國誤記」 新羅
화려현과 불내현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渠帥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337년에 樂浪²이 맥고려에 병합되면서 기록에서 東有樂浪이 사라지고 340년부터 貊國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樂浪²이 貊國이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정황으로 보아 위치도 樂浪²과 어울린다. 맥고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貊國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http://qindex.info/i.php?x=29708
 0342 ❰❰ 0042 「三國誤記」 新羅
貊帥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http://qindex.info/i.php?x=29720
 0343.09 ❰❰¹ 0283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변경을 침략해 왔다.
http://qindex.info/i.php?x=29962
 0343.10 ❰❰¹ 0283 「三國誤記」 新羅
槐谷城을 포위하자, 일길찬 양질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63
 0344.07 ❰❰² 0224 「三國誤記」
烽山-槐谷┆이벌찬 연진이 烽山 아래에서 백제와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304.07 304.08 375.09 375.10 386
http://qindex.info/i.php?x=30161
 0344.08 ❰❰² 0224 「三國誤記」
烽山-槐谷┆烽山城을 쌓았다. ┆304.07➔304.08 375.09 375.10 386
http://qindex.info/i.php?x=30162
 0346 ❰❰¹ 0286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64
 0350 ❰❰² 0230 「三國誤記」 助賁 - 仇道의 외손
조분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김씨 옥모부인은 仇道葛文王의 딸이다.
http://qindex.info/i.php?x=29991
 0351 ❰❰¹ 0291 「三國誤記」
末仇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성스럽고 절개가 있으며 지략을 갖추고 있어, 왕이 항상 찾아가 정치에서 중요한 점을 물어보았다. ▐ 末仇는 조분이사금의 외삼촌이다.
http://qindex.info/i.php?x=30000
 0355 ❰❰⁵ 0055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北鄙를 침범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41
 0356 ❰❰⁵ 0056 「三國誤記」 百濟
왕이 동부에 명하여 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42
 0363.10 ❰❰ 0063 「三國誤記」 新羅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http://qindex.info/i.php?x=26056
 0364.08 ❰❰ 0064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6057
 0364.10 ❰❰ 0064 「三國誤記」 新羅
다시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공격해 패주시켰다.
http://qindex.info/i.php?x=1251
 0366 ❰❰ 0066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해 함락하고서 2백 인을 남겨 머물러 지키게 했으나, 얼마 안 가 이를 회복했다.
http://qindex.info/i.php?x=1252
 0367 ❰❰² 0247 「三國誤記」 沾解 - 仇道의 외손
첨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까지 같은 조분왕의 동생이다. ▐ 첨해이사금은 仇道의 외손이다.
http://qindex.info/i.php?x=29995
 0370 ❰❰⁵ 0070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침략해 왔다.
http://qindex.info/i.php?x=6014
 0371.10 「三國誤記」 ❼國內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²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²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遷都於國内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고국원은 서천왕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환도성 인근에 있었다. 따라서 이때 도읍을 다시 환도성 인근으로 옮겼다고 해야 앞뒤로 이어지는 기록과 어울린다.
http://qindex.info/i.php?x=1824
 0372- ❰❰ -0018 「三國誤記」 百濟
與髙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백제의 왕성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372년의 사건이다.
http://qindex.info/i.php?x=8221
 0374 ❰❰⁵ 0074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니, 병사를 보내어 막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6016
 0375 ❰❰⁵ 0075 「三國誤記」 新羅
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http://qindex.info/i.php?x=6011
 0375.09 ❰❰² 0255 「三國誤記」
烽山-槐谷┆백제가 침략해 왔다. 일벌찬 익종이 槐谷 서쪽에서 맞서 싸우다가 적군에 살해되었다. ┆304.07 304.08➔375.09 375.10 386
http://qindex.info/i.php?x=30156
 0375.10 ❰❰² 0255 「三國誤記」
烽山-槐谷┆백제가 烽山城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304.07 304.08 375.09➔375.10 386
http://qindex.info/i.php?x=30157
 0376 ❰❰⁵ 0076 「三國誤記」 新羅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을 되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http://qindex.info/i.php?x=16793
 0377 ❰❰⁵ 0077 「三國誤記」 新羅
阿湌吉門 與⁺南加耶兵 戰於黄山津口 아찬 길문이 남가야의 병사들과 황산진 어귀에서 싸움을 벌였다. ▐ 황산진 건너편에 남가라가 있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加耶는 南加耶다.
http://qindex.info/i.php?x=6017
 0385 ❰❰⁵ 0085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http://qindex.info/i.php?x=6012
 0386.08 ❰❰² 0266 「三國誤記」
烽山-槐谷┆백제가 烽山城을 공격하자, 성주 직선이 용맹한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우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왕이 그 일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사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 ┆304.07 304.08 375.09 375.10➔386
http://qindex.info/i.php?x=30158
 0387 ❰❰⁵ 0087 「三國誤記」 新羅
영을 내려 말하기를 “짐이 부덕함에도 이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百濟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南加耶와 접해 있다. 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벽과 보루를 잘 수리하여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달에 加召城과 馬頭城 두 성을 축조하였다. ▐ 10년 전에 남가라와 전쟁을 했고 여기서도 신라의 남쪽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加耶는 南加耶다.
http://qindex.info/i.php?x=29845
 0390 ❰❰³ 0210.02 「三國誤記」 百濟
赤峴城과 沙道城의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들을 옮겼다.
http://qindex.info/i.php?x=16948
 0390 ❰❰³ 0210.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http://qindex.info/i.php?x=16852
 0391.05 ❰❰ 0392 「三國誤記」
夏五月王薨葬於故國壤號為故國壤王 여름 5월에 왕이 서거하여 고국양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양왕이라 하였다. ┆고국양왕은 384년에 즉위하였으니 고국양왕 9년은 392년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永樂五年歲在乙未(영락5년은 395년)와 以六年丙申(6년은 396년)에 의해 광개토왕의 즉위년인 영락 1년은 辛卯年(391년)이다.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없으므로 고국양왕 8년의 기록이 고국양왕 9년의 기록으로 잘못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http://qindex.info/i.php?x=7968
 0391.05 ❰❰ 0392 「三國誤記」
故國壤王 (九→)八年王薨
http://qindex.info/i.php?x=7967
 0393 ❰❰⁵ 0093 「三國誤記」 新羅→百濟
巡幸古(所→)沙夫里郡┆330년에 신라가 碧骨池를 만들었다는 기록처럼 이 기록도 오기로 보인다.
http://qindex.info/i.php?x=29970
 0394 ❰❰³ 0214.09 「三國誤記」 百濟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53
 0394 ❰❰⁵ 0094 「三國誤記」 新羅
⁺南加耶의 적이 馬頭城을 포위하였다.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000명을 이끌고 공격하게 하여 물리쳤다. ▐ 7년 전에 南加耶를 언급하며 馬頭城을 쌓았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加耶는 南加耶다.
http://qindex.info/i.php?x=6006
 0396 ❰❰³ 0216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x=16855
 0397 ❰❰³ 0217 「三國誤記」 百濟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949
 0397 ❰❰⁵ 0097 「三國誤記」 新羅
병사를 일으켜 ⁺南加耶를 정벌하고자 하니,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죄를 청하므로 그만두었다. ▐ 3년 전에 南加耶의 침공을 받았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加耶는 南加耶다.
http://qindex.info/i.php?x=16623
 0400 ❰❰³ 022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http://qindex.info/i.php?x=16856
 0405 ❰❰⁵ 0105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627
 0408 ❰❰⁵ 0108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牛谷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29862
 0409 ❰❰³ 022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http://qindex.info/i.php?x=16857
 0412.10 ❰❰ 0413 「三國誤記」
二十二年冬十月王薨號爲廣開土王 겨울 10월에 왕이 서거하니 이름을 광개토왕이라 하였다.┆광개토왕은 辛卯年(391)에 18세로 왕이 되었다가 39세에 죽었으니 죽은 해는 壬子年(412)이다. 장사는 甲寅年인 414년에 지냈다.
http://qindex.info/i.php?x=7969
 0412.10 ❰❰ 0413 「三國誤記」
長壽王諱巨連一作璉開土王之元子也體貌魁傑志氣豪邁開土王十八年立爲太子二十二年王薨即位 장수왕은 이름이 거련이다. 연이라고도 한다. 광개토왕의 원자이다.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하였다. 광개토왕 18년에 책립하여 태자를 삼았고 22년에 왕이 서거하여 즉위하였다.
http://qindex.info/i.php?x=7986
 0413 ❰❰⁵ 0113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644
 0413 「三國誤記」
(元年→)二年遣長史髙翼入晉奉表獻赭白馬安帝封王髙句麗王(樂安郡公→)樂浪公 2년에 장사 고익을 진에 들여보내 표를 올리고, 붉은 빛이 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가 왕을 봉하여 고구려왕 낙랑공이라 하였다. ┆313년은 장수왕 원년이 아니라 2년이다. 송서(488)에는 樂安郡公이 아니라 樂浪公으로 되어 있다.
http://qindex.info/i.php?x=7979
 0415 ❰❰⁵ 0125.07 「三國誤記」 新羅
또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넘어왔다. 왕이 글을 백제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주었다. 적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http://qindex.info/i.php?x=16824
 0416 ❰❰⁵ 0116 「三國誤記」 新羅
장수를 보내 加耶를 침략하게 하고 왕이 정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가야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굳게 지켰다. 때마침 비가 오랫동안 내리니 돌아왔다.
http://qindex.info/i.php?x=16647
 0425 ❰❰⁵ 0125.01 「三國誤記」 新羅
말갈이 北境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00
 0425 ❰❰⁵ 0125.07 「三國誤記」 新羅
또 大嶺柵을 습격하고 泥河를 넘어왔다. 왕이 글을 백제에 보내 구원을 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주었다. 적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http://qindex.info/i.php?x=29901
 0432 ❰❰¹ 0272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960
 0435 ❰❰¹ 0495 「三國誤記」 百濟
고구려가 와서 雉壤城을 포위하자 왕이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나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25940
 0437 ❰❰⁵ 0137 「三國誤記」 新羅
말갈이 塞를 침입하여 長嶺의 다섯 목책을 불태웠다.
http://qindex.info/i.php?x=16846
 0439.09 ❰❰⁵ 0139 「三國誤記」 新羅
長嶺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붙잡아가고 노략질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47
 0439.10 ❰❰⁵ 0139 「三國誤記」 新羅
다시 쳐들어왔는데, 눈이 많이 오는 바람에 물러갔다.
http://qindex.info/i.php?x=16848
 0440 ❰❰⁵ 0140 「三國誤記」 新羅
長嶺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비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849
 0441 ❰❰¹ 0501.11 「三國誤記」 百濟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水谷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5952
 0442 ❰❰⁵ 0142 「三國誤記」 新羅
여러 신하를 불러 말갈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찬 웅선이 불가하다는 말을 올리니, 그만두었다.
http://qindex.info/i.php?x=16850
 0443 ❰❰¹ 0503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馬首柵을 소각하고 髙木城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http://qindex.info/i.php?x=25916
 0446 ❰❰¹ 0506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침입하여 高木城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http://qindex.info/i.php?x=25920
 0447 ❰❰¹ 0507.05 「三國誤記」 百濟
髙木城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5921
 0455 ❰❰⁵ 0155 「三國誤記」 百濟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탄로나자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그를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여러 성이 성벽을 굳게 하여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니,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http://qindex.info/i.php?x=16814
 0463 ❰❰¹ 0523.08 「三國誤記」 百濟
고구려 군사가 浿水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물리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30212
 0465 ❰❰⁵ 0165 「三國誤記」 新羅
아찬 길선이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자, 사형에 처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망명하여 백제로 갔다.
http://qindex.info/i.php?x=16660
 0467.07 ❰❰⁵ 0167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나라 서쪽에 있는 두 성을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고 백성 1,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http://qindex.info/i.php?x=6022
 0467.08 ❰❰⁵ 0167 「三國誤記」 新羅
일길찬 흥선에게 명령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이 또한 직접 기병 8,000명을 통솔하여 漢水을 따라 나아가 이르렀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해할 것을 요청하였다.
http://qindex.info/i.php?x=7564
 0469 ❰❰¹ 0529 「三國誤記」 百濟
고구려 왕 흥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 穴城을 쳐들어와서 빼앗았다.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http://qindex.info/i.php?x=30213
 0470 ❰❰⁵ 0170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변경을 공격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5504
 0490 「三國誤記」 冊府元龜
武帝 永明 八年 正月 百濟王 (牟太→)牟大遣使上表 490년 1월에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렸다.
http://qindex.info/i.php?x=30423
 0490 ❰❰ 0488 「三國誤記」 百濟
(魏→)髙麗遣兵來伐 고려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다. ┆백제는 표문에서 고려를 험윤 또는 흉리라 표현했는데 남제는 이를 북위로 오독했다.
http://qindex.info/i.php?x=16633
 0490 ❰❰⁵ 0190 「三國誤記」 新羅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http://qindex.info/i.php?x=14918
 0490 ❰❰⁵ 0190 「三國誤記」 百濟
出兵襲新羅西境圎山郷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http://qindex.info/i.php?x=6009
 0499 ❰❰⁵ 0199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국경을 침범해 왔다
http://qindex.info/i.php?x=27495
 0501 ❰❰⁵ 0201 「三國誤記」 新羅
⁺南加耶國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왔다.
http://qindex.info/i.php?x=16670
 0503 ❰❰⁵ 0203 「三國誤記」 新羅
말갈이 境을 침범해 왔다.
http://qindex.info/i.php?x=29906
 0507 ❰❰⁵ 0207.01 「三國誤記」
拜王子利音或云奈音爲伊伐湌兼知内外兵馬事 왕자 이음(利音, 혹은 奈音이라고도 하였다)을 이벌찬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도록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40
 0508 ❰❰⁵ 0208.04 「三國誤記」
倭人犯境遣伊伐湌利音將兵拒之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여, 이벌찬 이음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641
 0509 ❰❰⁵ 0209 「三國誤記」 新羅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来請救 王命大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徃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포상팔국이 가라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대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가라를 구해주라고 명령하였다. 포상8국의 장군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6,000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http://qindex.info/i.php?x=1637
 0509 ❰❰⁵ 0196~0230 「三國誤記」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六部軍徃救 遂敗八國兵 포상의 여덟 나라가 함께 아라국을 치기로 하자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니 드디어 여덟 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 물계자는 나해 이사금 시기의 인물이라고 되어 있고 나해 이사금의 재위기간은 196년에서 230년까지로 되어 있다.
http://qindex.info/i.php?x=2183
 0509 ❰❰⁵ 0209 「三國誤記」 新羅
浦上八國謀侵⁺南加羅 ⁺南加羅王子来請救 王命大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徃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포상팔국이 남가라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자 남가라 왕자가 와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대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라고 명령하였다. 포상8국의 장군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6,000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http://qindex.info/i.php?x=16673
 0510 ❰❰⁵ 0210.02 「三國誤記」 百濟
赤峴城과 沙道城의 두 성을 쌓고 동부의 민호들을 옮겼다.
http://qindex.info/i.php?x=29872
 0510 ❰❰⁵ 0210.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http://qindex.info/i.php?x=29874
 0512 ❰❰⁵ 0196~0230 「三國誤記」
後三年 骨浦·㭍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3년 뒤에 골포·칠포·고사포 세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갈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구하고 세 나라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물계자는 수십여 명의 목을 베었으나 그 공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또 얻은 바가 없었다.┆포상8국이 남가야를 침공한 시기가 509년이라면 이 사건은 3년 후인 512년의 일이 된다.
http://qindex.info/i.php?x=16741
 0512 ❰❰⁵ 0212 「三國誤記」 新羅
⁺南加耶送王子爲質 남가야가 왕자를 볼모로 보내왔다.┆509년에 신라가 포상8국으로부터 남가야를 구원해 주었기 때문에 볼모를 보낸 듯하다.
http://qindex.info/i.php?x=16675
 0514 ❰❰⁵ 0214.07 「三國誤記」
百濟來攻國西腰車城殺城主薛夫王命伊伐湌利音率精兵六千伐百濟破沙峴城 백제가 나라 서쪽의 요거성에 쳐들어와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에게 명령해 정예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을 함락시켰다. ▐ 490년에 沙峴城을 쌓았으므로 이 사건은 514년의 일로 어울린다.
http://qindex.info/i.php?x=30091
 0514 ❰❰⁵ 0214.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와서 述川에 이르렀다.
http://qindex.info/i.php?x=16854
 0514 ❰❰⁵ 0214.1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와서 述川에 이르렀다.
http://qindex.info/i.php?x=29877
 0516 ❰❰⁵ 0216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x=16934
 0516 ❰❰⁵ 0216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x=29879
 0517 ❰❰⁵ 0217 「三國誤記」 百濟
沙道城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881
 0518 ❰❰⁵ 0218 「三國誤記」 新羅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나왔다. 백제인들이 와서 獐山城을 포위하자, 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나와 백제인들을 공격해 달아나게 만들었다.
http://qindex.info/i.php?x=29824
 0520 ❰❰⁵ 0220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北邊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http://qindex.info/i.php?x=29883
 0520 ❰❰⁵ 0220.03 「三國誤記」
伊伐湌利音卒以忠萱爲伊伐湌兼知兵馬事 이벌찬 이음이 죽자 충훤을 이벌찬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도록 했다.
http://qindex.info/i.php?x=7780
 0522 ❰❰ 0529 「三國誤記」 日本書紀
백제왕이 下哆唎國守 수적압산신에게 “무릇 조공하는 사자는 늘 바다 가운데의 굽은 섬을 피하느라 매번 풍파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가라의 ❷多沙津을 신들이 조공하는 나루터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압산신이 듣고 아뢰었다.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 진은 官家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6659
 0522 ❰❰⁵ 0222 「三國誤記」
백제군이 牛頭州로 침범해 들어오기에 伊伐湌 忠萱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게 되자 혼자 말을 타고 되돌아왔으므로 진주로 강등시키고 連珍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4920
 0522 ❰❰⁵ 0222 「三國誤記」 百濟
군사를 보내 신라의 牛頭鎭으로 들어가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의 장군 忠萱이 군사 5,000명을 이끌고 熊谷에서 맞아 싸웠으나 크게 지고 혼자 말을 타고 도망갔다.
http://qindex.info/i.php?x=16755
 0524 ❰❰⁵ 0214.09 「三國誤記」 百濟
북부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29876
 0524 「三國誤記」 新羅
왕이 나아가 남쪽 변방의 새로 확장한 영토를 순행하였는데 ⁺南加耶國의 왕이 와서 만났다.
http://qindex.info/i.php?x=16750
 0526~0539 「三國誤記」 梁職貢圖
斯羅國 或屬韓或屬倭✘┆屬韓은 백제의 농간에 의한 것으로 보이고 屬倭는 왜왕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주장한 내용이다. 왜가 수시로 신라를 침공한 것을 보면 신라는 왜의 속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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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6~0539 「三國誤記」 梁職貢圖
斯羅國 無文字刻木為範✘┆당시에 만들어진 비석이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모두 한자로 표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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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9 ❰❰⁵ 022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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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9 ❰❰⁵ 022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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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1.10 ❰❰ 0553 「三國誤記」 日本書紀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 553년의 정황에는 맞지 않으므로 551년으로 옮긴다. 고려는 9월에 돌궐의 침공을 받았으므로 한 달 후에 있었던 백제의 침공에는 무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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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3.07 「三國誤記」 新羅
取百濟東北鄙置(新興→)新州以阿湌武力爲軍主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여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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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4.12 ❰❰ 0554.07 「三國誤記」 新羅
백제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일본서기(720)의 기록에 맞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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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4.12 ❰❰ 0554.07 「三國誤記」 百濟
王欲襲新羅親帥歩騎五十夜至狗川新羅伏兵發與戰爲亂兵所害薨謚曰聖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聖이라 하였다. ▐ 일본서기(720)의 기록에 월과 날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야기도 자세하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에 맞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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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5 「三國誤記」 新羅
置(完山州→)下州於(比斯伐→)比自火 비자벌에 하주를 설치했다.┆신라는 555년에 比自火에 下州를 설치했는데, 삼국사기는 比自火와 完山의 다른 이름인 比斯를 혼동했기 때문에 比斯에 完山州를 설치한 것으로 오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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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6 ❰❰ 0016 「三國誤記」
(신라) 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 바쳤다. ┆북명은 지금의 안변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것은 551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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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8 ❰❰⁵ 0258 「三國誤記」 百濟
말갈 추장 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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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4 ❰❰⁵ 0264 「三國誤記」 新羅
왕이 黃山으로 행차하여 늙고 가난하여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 진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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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5 「三國誤記」 新羅
廢(完山州→)下州 하주를 폐지하였다. ┆신라는 565년에 比自火에 설치된 下州를 폐지했는데, 삼국사기는 比自火와 完山의 다른 이름인 比斯를 혼동했기 때문에 完山州를 폐지한 것으로 오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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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82 ❰❰⁶ 0222 「三國誤記」 新羅
백제군이 牛頭州로 침범해 들어오기에, 이벌찬 충훤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게 되자, 혼자 말을 타고 되돌아왔으므로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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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94 ❰❰⁵ 0294 「三國誤記」 新羅
多沙郡이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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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41+ 「三國誤記」 奉使高麗記
馬訾水高驪一名淹水✘ 今名鴨淥水✘ 經國內城南又西與一水合即鹽難也✘┆마자수는 지금의 허천강이고 염난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엄수는 압록강 북쪽 부여와 고구려 사이에 있었고 국내성 남쪽에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지금 혼강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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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0 「三國誤記」 完山
一云比斯(伐×) 一云比自火✘ 비사라고도 한다.┆比斯는 完山의 다른 이름인데 삼국사기는 이 比斯를 比自火와 혼동하였고 그래서 比斯伐로 오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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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4 「三國誤記」 支潯州
馬津縣夲孤山➔馬津縣夲馬突 마진현은 마돌이라고도 한다. ▐ 삼국사기(1145)는 지심주를 변산반도 일대로만 생각하고 현들을 웅천주의 현에 대응시켰다. 그래서 지심주의 馬津도 원래 완산주의 馬突(馬珍)이었는데 웅천주의 烏山에 잘못 대응시켰다. 게다가 烏山도 후대에 개칭한 孤山으로 잘못 적어 馬津縣夲孤山이란 기술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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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4 「三國誤記」 支潯州
巳汶縣夲今勿➔己汶縣一云竒物 기문현은 기물이라고도 한다.┆己汶은 가야에서 竒物이라고 했는데, 이 竒物과 백제 웅천주의 今勿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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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4 「三國誤記」 魯山州
淳遲縣 夲(豆尸→)豆伊 ▐ 淳遲가 속한 노산주에는 唐山이 들어 있는데, 唐山이 완산(仇智山) → 노산주(唐山) → 전주(金溝)로 이어지므로 淳遲 또한 진내군(豆尸伊) → 노산주(淳遲) → 진례군(伊城)으로 이어지는 것보다 완산(豆伊) → 노산주(淳遲) → 전주(杜城)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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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三國誤記」 全州
真興王十六年爲州✘ 二十六年州癈✘ ┆신라는 555년에 比自火에 下州를 설치했다가 565년에 폐지했다. 삼국사기는 比自火와 全州의 옛 이름인 比斯를 혼동했기 때문에 555년에 比斯에 州를 설치했다가 565년에 폐지한 것으로 오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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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三國誤記」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古寧을 加耶가 있었던 高靈과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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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三國誤記」 咸安郡
一云(阿郡加耶→)阿尸耶 안야라고도 한다.┆加良·加耶나 大良·大耶처럼 阿尸良에는 阿尸耶가 짝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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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三國誤記」 奈靈郡
本(百濟奈巳郡→)高句麗大楊管郡 본래 고구려 대양관군이다.┆奈靈과 奈巳가 유사해서 착오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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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三國誤記」 火王郡
一云比斯伐✘ ┆火王郡의 옛 이름인 比自火와 完山의 다른 이름인 比斯를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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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57 「三國誤記」 髙靈郡
夲(大×)加耶國 본래 가야국이다.┆加耶를 大耶와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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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42.10 「三國誤記」 高麗史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 전쟁을 불러올 정도의 도발인데 거란의 보복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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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4 「三國誤記」 金史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新羅來 年已六十餘矣 금시조는 이름이 함보인데 신라에서 나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 금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나라에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송막기문(1156)에 신라인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는 신라가 고려로 바뀐 지 200여년 후의 시점에서 금나라가 자신들의 시조를 신라인으로 인식하였다는 뜻이다. 이후 원나라가 금사(1344)를 편찬할 때까지 200여년간 모든 사서에서 신라인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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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公嶮鎭
後沒於元 稱海洋(一云三海陽) 恭愍王時 收復舊疆 恭讓王二年 置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在北 雄州在南) 有卵島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해양(삼해양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90년에 웅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州가 북쪽에 있고 웅주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난도가 있다. ▐ 公嶮鎭을 두었던 곳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했고 훗날 吉州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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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¹
吉州久爲女眞所據 號弓漢村 睿宗三年 置州 爲防禦使 (六年→)四年 築(中城→)重城 尋以地 還女眞 길주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09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 1109년에 길주가 포위당하자 許載가 重城을 쌓아 버틴 바 있다. 길주를 포함한 9성은 그 해에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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