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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 後漢書(445)
二十五春正月遼東徼外貊人(貊人穢貊國人也貊音陌)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遼東太守祭肜招降之 烏桓大人來朝(大人謂渠帥也) 요동 요외의 맥인(예맥국 사람을 말한다)이 우북평, 어양, 상곡 그리고 태원을 침략하였다.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 오환의 대인이 내조하였다.(대인은 우두머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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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 "우북평, 어양, 상곡 그리고 태원을 침략한 건 고구려가 아니라 오환이다."
▐ 맥이 49년 정월에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략하자 遼東太守 祭肜이 불러 항복시켰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이상한 점이 많다. (1) 이들 지역은 고구려가 침략하기 힘든 지역이고 (2) 이들 지역은 오환의 침략이 잦았던 지역이며 (3) 삼국지에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오환의 일이 맥인의 일로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과 오환, 제융 그리고 맥인의 역사가 혼동되어 발생한 착각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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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爲臣智其次爲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면포를 만들었다.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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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又以丈許木鍤之通日嚾呼作力不以爲痛旣以勸作且以爲健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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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마한에도 성곽이 있었다."
▐ 앞에서는 성곽이 없다고 했다가 뒤에서는 성곽을 쌓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모순을 보이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성곽이 없었다는 부분이 잘못된 것이다. 후한서(445)는 이 모순을 해결하고자 無城郭은 살리고 官家使築城郭은 有築室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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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8 송서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는 치소를 두고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10020
 
0488 "요서를 차지한 건 백제가 아니라 단부 선비다."
▐ 송서(488) 등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고 되어 있는데, 진나라 말에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지 못했으며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 창려, 요동 등 평주는 모용부 선비가 차지했고 요서, 북평 등 유주는 단부 선비가 차지했었다. 고구려의 자리에 모용을 넣고 백제의 자리에 단을 넣어야 자연스럽다.
10018
 
0554 위서
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성을 고씨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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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고구려란 명칭은 고려의 시조가 만든 게 아니다."
▐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듬해에 옥저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고구려는 현으로 만들어 이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낙랑군에 소속시켰다. 그래서 현도군에는 고구려, 상은태 그리고 서개마 3현이 있었다. 고구려란 명칭은 기원전 37년 이전에 이미 이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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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고려의 시조는 고씨 성을 만들지 않았다."
▐ 송서(488)의 413년 기록에 장수왕의 이름이 고연(高璉)이라 표기된 것이 현재까지 고려왕의 성이 나타나는 가장 이른 기록이다. 그 이전에는 이름만 나타나고 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이 고씨로 고정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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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爲東夷强國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7517
 
0636 "백제의 구태는 부여왕 위구태의 착오다."
▐ 탁리국의 시녀가 낳은 동명이 도망나와 부여를 세웠다는 논형의 이야기, 공손탁이 부여왕 위구태에게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고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었다는 삼국지의 이야기 그리고 백제의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는 위서의 이야기가 결합하여, "부여를 세운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세우자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14816
 
0648 진서
遂城(秦築長城之所起) 수성(진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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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사기索隱(司马贞)
大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又水經云在遼西臨逾縣南水中葢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태강지리지(280~289)에는 '낙랑 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여기서 시작된다'고 되어 있고 수경에는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갈석산이 있다'고 되어 있어 두 개의 갈석이 있다. 오른쪽에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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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9~0732 "진장성은 낙랑 수성까지 오지 않았다."
▐ 서진의 당빈이 온성에서 갈석까지 장성을 복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진장성을 복구한 것으로 추켜졌다. 또 이 장성은 온성이 아니라 무수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식되기도 했는데 무수가 수성으로 개명되면서 낙랑 수성으로 착각되었다. 그래서 낙랑 수성에 갈석산이 있고 진장성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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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 고려의 시조는 동명인가? ○ 왕망에게 살해된 사람은 고려 장수인가? ○ 낙랑공주의 낙랑는 평양에 있었나? ○ 왜군에게 살해된 우로는 신라 장수인가? ○ 고려는 한국사인가? ○ 궁예가 세운 나라는 후고구려인가?
1773#7508 COMMENT
 
日本書紀
1773#1915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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