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012 高句麗 > 0012 추모왕 피살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0012 「三國誤記」 高句麗
尤誘(我將延丕→)我侯騶靳之 엄우가 우리 후 추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 ┆한서(82), 삼국지(289) 그리고 후한서(445)에 모두 고구려후 騶 또는 騊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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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0082 한서 - 騶
莽發高句驪兵 當伐胡 不欲行 郡強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為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為所殺 州郡歸咎於高句驪侯騶 嚴尤奏言 貉人犯法 不從騶起 匈奴未克 夫餘 穢貉復起 此大憂也 莽不尉安 穢貉遂反 詔尤擊之 尤誘高句驪侯騶至而斬焉 傳首長安 莽大說 下書曰 其更名高句驪為下句驪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貉人愈犯邊 東北與西南夷皆亂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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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한서 - 騶
왕망(9~23)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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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 騊
왕망(9~23)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구려후 도(騊)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천하에 알려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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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광개토왕릉비 - 鄒牟
시조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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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후한서 - 騶
왕망(9~23) 초에 구려의 병력를 뽑아 흉노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구려후 추(騶)를 들어오게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맥인이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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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후한서 - 騶
▐ 한서의 기록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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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유리왕 31년에 왕망이 우리의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게 되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서울에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의 명칭을 하구려후로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때부터 도적들이 한(漢)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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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19년에) 왕이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 여기에 나오는 龍山은 고려사에서 추모왕릉이 있다고 하는 평양의 그 龍山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기록은 추모왕릉이 卒本에 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과 모순된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수집한 결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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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제왕운기
동명왕 주몽이 재위한지 19년 9개월 만에,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으셨네. 성자 유리(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한 사람)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남기신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네. (지금의 용산묘다.) ▐ 시신 없이 장사를 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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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한서(82)의 騶와 광개토왕릉비(414)의 鄒牟는 발음이 비슷하다. 鄒牟의 다른 표기와 비교해 보면 이것을 실감할 수 있다. ┆騶(한서,후한서)┆騊(삼국지)┆鄒牟(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명,삼국사기)┆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고을덕묘지명,천남산묘지명,통전,古記,삼국사기)┆仲牟(일본서기)┆都慕(속일본기)┆中牟(안승 책문)┆衆解(삼국사기)┆東明(삼국사기)┆ 모두루묘지명(450±)에는 冉牟라는 명칭이 나오므로 牟가 이름에 접미사처럼 붙는 말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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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한서(82)는 騶를 高句驪侯라 명시하였고 광개토왕릉비(414)도 鄒牟를 王이라 명시하였다. 여기서 侯는 王을 낮춰부르는 말이다. 한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騶가 고구려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병력이 이탈한 것에 대해 신나라 내에서 騶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가장 먼저 나왔다거나 騶에게 죄를 물으면 부여와 예맥이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거나 하는 부분이다. 騶가 일개 장수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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❸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광개토왕릉비(414)에는 鄒牟王이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 있고 제왕운기(1287)에는 東明이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아 유리가 와서 왕위를 잇고 추모왕이 남긴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모두 시신없이 鄒牟王을 장사지낸 듯한 이야기다. 한서(82)에 나오는 騶도 엄우가 유인하여 죽인 뒤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으므로 고구려에서는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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❹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삼국사기(1145)가 한서(82), 삼국지(289) 그리고 후한서(445)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왕망에 의해 살해된 인물만 고구려후 騶에서 고구려 장수 延丕로 바꾸어놓았다. 延丕 이야기는 다른 기록으로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당연히 삼국사기의 기록을 왜곡된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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❺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한서(82)에서 고구려후 騶가 왕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1145)에서 고구려 장수 延丕가 살해된 이야기로 바뀌어 나오는 것은, 일본서기(720)에서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이 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서 신라 장수 于老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경우가 비슷하여 모두 왜곡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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❻ 騶를 鄒牟로 보는 이유
鄒牟王의 건국 시기에 대해 안승 책문(670)에는 -132년경으로 되어 있고 고자 묘지명(700)에는 -40년으로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720)에는 -32년경, 신당서(1060)에는 -232년경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는 -37년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삼국사기의 고구려 초기 기록은 매우 불확실하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鄒牟王이 -19년에 죽었다고 나온다는 이유로, 12년에 살해되었다고 한서(82)에 나오는 騶가 鄒牟王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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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문천 -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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