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靺鞨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과 서로 엮여 있으므로, 樂浪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靺鞨의 기록도 그렇게 해야 한다. 靺鞨은 백제와 얽혀 -17년부터 258년까지 275년 동안 26회 나오다 258년부터 387년까지 130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4년부터 558년까지의 사건이 되어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
이 靺鞨은 철원에 있었던 이름모를 소국으로 추정된다.
›
漢城 함락 전후의 연도 조정
① 백제와 고려는 369년부터 399년까지 31년 동안 15차례나 전쟁을 했으나 400년부터 468년까지 69년 동안은 전쟁 기록이 전혀 없다.
② 472년에 백제는 30여년간 고려와 전쟁을 이어오고 있으니 구원해 달라고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
③ 백제는 475년에 고려에 한성을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쫓겨가는데 기록은 한성 이북과 예성강에서 고려와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고 되어 있다.
정황에 맞지 않는 이 기록들을 60년 앞당기면 모순이 모두 해소된다.
16818#1248
SHARED
•
-0037 三國史記(1145) 高句麗
그 땅(도읍을 삼았던 졸본천 또는 흘승골성)이 靺鞨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靺鞨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 이 당시에는 靺鞨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원래 '이질적인 어떤 종족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훗날 '말갈과 이웃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변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557
SHARED
›
-0017〜0258 ➔ 0284〜0558 百濟
▐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靺鞨은 철원에 있었던 이름모를 소국으로 추정된다.
이 靺鞨은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과 서로 엮여 있으므로, 樂浪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靺鞨의 기록도 그렇게 해야 한다.
백제의 靺鞨 기록은 258년에서 387년까지 130년 동안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전 -17년부터 258년까지 275년 26회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284년부터 558년까지의 사건이 된다.
16818#30040
SHARED
•
-0017✘ 三國史記 百濟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16965
SHARED
•
-0011✘ 三國史記 百濟
靺鞨²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賊糧盡而歸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29715
SHARED
•
-0009✘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곤미천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청목산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봉현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29717
SHARED
›
0125 ~ 0203 ➔ 0425 ~ 0503 新羅
▐ 靺鞨은 신라와 얽혀 125년부터 203년까지 79년 동안 8회 나오다 204년부터 395년까지 192년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공백기 이전의 기록을 300년 뒤로 물리면 425년부터 503년까지의 사건이 된다.
북유말갈은 철원에 있었고 동유낙랑은 춘천에 있었다면, 신라는 동유낙랑이 망한 337년 이후에 말갈의 침공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이와 부합한다.
16818#29915
SHARED
•
0216✘ 三國史記 百濟
말갈이 와서 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29878
SHARED
•
0284 ❰❰ -0017 「三國誤記」 百濟
王謂羣臣曰 靺鞨²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16820
SHARED
•
0286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阿且城과 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 부여와 대방이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그 부여를 백제로 착각한 것이다.
16859
SHARED
•
0292 ❰❰ -0009 「三國誤記」 百濟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靺鞨寇北境).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16823
SHARED
•
0295 @철원 @궁예고려의 도성
백제가 北有靺鞨이라 부르던 세력은 백제본기에서 靺鞨連我北境, 靺鞨侵北境 그리고 靺鞨寇北境으로 나타나는데, 백제의 북쪽에 접하여 있으며 변경을 자주 침공하였다.
철원은 대동강에서 영흥만이나 춘천으로 가려면 거쳐가야하는 지역이고 영흥만과 한강 하류를 잇는 추가령구조곡의 가운데에 있기도 하다. 농경에 적합한 평지도 넓어 北有靺鞨이 있었음직하다.
19829
SHARED
•
0369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니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급히 쳐부수고 5천여 명을 잡았는데 사로잡은 포로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819
SHARED
•
0393.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진무에게 말하기를, “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진무는 몸소 군사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石峴城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30187
SHARED
•
0475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궁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30204
SHARED
•
0481 三國史記 新羅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北邊에 쳐들어와 狐鳴城 등 7성을 빼앗고, 또한 彌秩夫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泥河 서쪽까지 추격해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6867
SHARED
•
0551 - 三國史記(1145) 朔州
朔州는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남쪽이자 예의 서쪽 옛 맥의 땅이며(句麗之東南 濊之西 古貊地) 대개 지금 신라의 북쪽인 朔州다.
선덕왕 6년에 牛首州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한편 문무왕 13년에 首若州를 설치했다고 이른다. 경덕왕이 朔州로 고쳐 삼았다. 지금은 春州이다.
16898
SHARED
•
0551 - 三國史記(1145) 朔州
▐ 40년에 화려와 불내의 신라 침공을 중간에서 막았던 貊國에 대응시킬 수 있다. 맥국은 東有樂浪이 멸망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나며 위치도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東有樂浪과 비슷하기 때문에 東有樂浪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東有樂浪은 지금의 춘천에 있었던 것이 된다.
19797
SHARED
•
0551 百濟와 新羅의 고려침공
▐ 백제 성왕이 직접 백제와 임나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을 되찾고 더 진군하여 평양까지 차지하였는데, 이로써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신라 진흥왕도 거칠부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여 죽령에서 고현에 이르는 10군을 빼앗게 하였다. 이때 철원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던 듯하다. 이를 반영하듯 이후의 기록에는 北有靺鞨²이 나타나지 않는다.
19816
SHARED
•
0565 北齊書(636)
是歲 高麗契丹靺鞨¹並遣使朝貢
고려, 거란 그리고 말갈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해왔다.
▐ 北有靺鞨²이 신라에 흡수되고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의 기록에 靺鞨¹이라는 표기가 나타나 勿吉을 대체하였다. 靺鞨¹은 勿吉과 발음이 비슷해서 勿吉이 변해서 생긴 말로 추정된다.
193
SHARED
•
0598 三國史記(1145) 高句麗 靺鞨
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니 영주 총관 위충이 이를 격퇴하였다.
▐ 이 당시 北有靺鞨²이 있던 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고 요서 지역을 침공하는 데 동원할 병력으로는 北有靺鞨²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말갈은 勿吉靺鞨¹로 볼 수 밖에 없다.
중국의 기록에 北有靺鞨²이 나온 사례는 보지 못했다.
16958
SHARED
•
0612 三國史記(1145) 高句麗 靺鞨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동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16959
SHARED
•
0615+ 海東安弘記
海東安弘記云 九韓者一日夲·二中華·三吳越·四乇羅·五鷹逰·六靺鞨·七丹國·八女真·九穢貊
해동안홍기에 이르기를 9한이란 것은 1 일본, 2 중화, 3 오월, 4 탁라, 5 응유, 6 말갈, 7 단국, 8 여진, 9 예맥이라고 하였다.
19373
SHARED
•
0615+ 海東安弘記
▐ 勿吉이 靺鞨이라 불리기 전부터 우연히 신라인들이 靺鞨이라 부르는 존재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신라인들이 북쪽 변경을 자주 침략해 오던 세력을 靺鞨이라 불렀던 것은, 중국인들이 동북 지역의 勿吉을 靺鞨라 부르던 것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獫狁은 원래 중국인들이 북방 유목민을 가리키던 말인데 백제는 중국에 보낸 문서에서 자신을 자주 침공해오던 고려를 가리켜 獫狁이라 했다.
신라의 靺鞨도 같은 경우라 볼 수 있다.
19795
SHARED
•
0645 新唐書(1060)
帝曰 虜墮吾策中矣 命左衛大將軍阿史那社尒以突厥千騎嘗之 虜常以靺鞨¹銳兵居前 社尒兵接而北
태종은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을 이끌고 가서 유인하게 하였다. 고구려가 늘 말갈의 예병을 앞세우므로 사이의 군사가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16953
SHARED
•
0645 舊唐書(945)
高麗北部傉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貞率高麗·靺鞨¹之衆十五萬來援安市城
고려의 북부녹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정이 고려·말갈의 무리 15만명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16951
SHARED
•
0645 舊唐書(945)
太宗簡傉薩以下酋長三千五百人 授以戎秩 遷之內地 收靺鞨¹三千三百 盡坑之 餘衆放還平壤
태종은 녹살 이하 추장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군직을 주어서 내지로 옮겼다. 말갈 사람 3천 3백명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평양으로 돌려 보냈다.
16952
SHARED
•
0655 三國史記(1145) 新羅 靺鞨
고구려가 백제 및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다.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 北有靺鞨²은 551년에 신라가 차지하였고 고려가 勿吉靺鞨¹을 전쟁에 동원한 것은 598년의 기록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 기록의 말갈도 勿吉靺鞨¹로 볼 수 밖에 없다.
16874
SHARED
•
0658 三國史記(1145) 新羅 靺鞨
王以何瑟羅地連靺鞨²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왕이 하슬라의 땅이 말갈에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을 폐지하여 주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을 북진으로 삼았다.
▐ 北有靺鞨²은 395년에 신라의 北邊에 쳐들어와 悉直의 들판에서 교전한 바 있고 468년에도 고려와 함께 쳐들어와 北邊의 悉直城을 공격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말갈도 北有靺鞨²이다.
17015
SHARED
•
1156 松漠紀聞
女真即古肅慎國也 東漢謂之挹婁 元魏謂之勿吉 隋唐謂之靺鞨
여진은 옛 숙신국이다. 동한은 읍루라 했고 탁발위는 물길, 수당은 말갈이라 했다.
▐ 肅慎 ➔ 挹婁(東漢) ➔ 勿吉(元魏) ➔ 靺鞨(隋唐) ➔ 女真(趙宋)
16900
SHARED
•
東有樂浪(貊國)
삼국사기(1145)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낙랑은 樂浪郡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낙랑은 336년, 314년 그리고 304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299년에 백제를 침공했으며 295년에 백제에 의해 東有樂浪이라 불리웠고 293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했다.
이것이 두번째 의미의 樂浪이다.
東有樂浪이 맥고려에 의해 멸망당한 후 비슷한 위치에서 貊國이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나라로 추정한다.
16889
SHARED
•
樂浪郡
樂浪郡은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군이다. 313년까지 400여년간 대동강 유역에 존속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의미의 樂浪이다.
29711
SHA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