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遼黑史 > 1392 元明 교체 > 1387~1388 철령위와 위화도 회군

천산산맥 북쪽에 금의 함주가 있었다. 금을 멸망시킨 원은 왕고의 철령 북쪽에 있던 함주를 이와 혼동하여 인근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소속시켰다. 또 금의 함주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는데 쌍성총관부를 이 개원로에 소속시켰다. 원을 몰아낸 명은 원의 개원로에 속했던 철령 이북을 왕고로부터 돌려받아 철령위를 설치하고 새로 설치된 요동도사에 소속시키려 하였다. 왕고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했으나 정벌군 장수 이성계는 반란을 일으켰다.
 
0242~0612 중국 선제 공격 사례
242년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245년 한국의 기리영 공격┆311년 미천왕의 서안평 공격┆598년 영양왕의 요서 공격 ▐ 모두 중국의 엄청난 반격을 불러와 민중들만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우왕의 요동정벌 또한 실현되었다면 같은 결과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왕의 명을 받아 정벌에 나섰다가 군대를 되돌려 왕을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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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咸州
1019년에 요나라가 咸州를 설치하였고 금나라가 咸州路로 바꾸었다가 1150년에 다시 咸平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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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雙城縣
요나라가 설치하고 금나라가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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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109 咸州
1107년에 왕고가 咸州를 설치하였다가 1109년에 여진에 돌려주었다. 요나라가 요하 유역에 설치한 咸州와 이름이 같기 때문에 1258년에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을 차지하는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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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1234 金
1115~1234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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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1356 元
1234~1356 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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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雙城摠管府
▐ 雙城摠管府(1258) → 和州牧(1356) → 和寧府(1369) → 永興府(1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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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鐵嶺
원나라는 이 고개 이북을 쌍성총관부에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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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 朝鮮王朝實錄
孛顔帖木兒(이춘)가 죽었다. 함흥부의 예안부 운천동에 장사지내니, 곧 義陵이다. 塔思不花(이자흥)가 사유를 갖추어 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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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開元路
▐ 원나라가 黄龍府(吉林農安縣)에서 咸平府(奉天開原縣)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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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이성계의 정벌
1370 이성계의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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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이성계의 정벌
이성계의 정벌 경로는 東北面 → 黃草嶺 → 雪寒嶺 → 鴨綠江 → 亏羅山城이다. 이 경로는 1342년에 이성계의 백부가 원나라로부터 관직의 계승을 승인받을 때, 개원로에 보낸 사람이 이동한 경로와 겹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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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1375 定遼衛
1371년 원나라의 유신 遼陽行省平章政事 유익이 요양을 들어 투항하자 행성을 폐지하고 설치하였는데, 1375년 遼東都指揮使司로 개편하여 중앙의 左軍都督府에 소속시켰다. 관할지역은 동으로는 압록강, 서로는 산해관, 남으로는 旅順海口, 북으로는 開元에까지 이르렀으며, 그 아래에 2州·25衛가 속하여 있었다. 철령위도 이 25위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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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03 明史(1739)
앞서 원나라 말기에 遼陽·藩陽 지방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옮겨 간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 말을 사는 기회에 황제가 명을 내려 그들을 찾아내도록 하니, 마침내 요양·번양 지방의 유망민 3백여명이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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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 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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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高麗史(1451)
설장수가 명나라 수도에서 돌아와 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니 요동에 귀속시키겠다. 그 나머지 개원·심양·신주 등지의 군과 민은 원래의 생업에 복귀시키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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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王高 禑王 表
명에서 철령위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였다.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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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王高 禑王 表
▐ 文州, 高州, 和州, 定州, 咸州, 公嶮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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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2 高麗史節要(1452)
최영이 여러 재상과 함께 定遼衛를 공격할지와 화친을 청할지의 가부를 논의하였는데,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따랐다. 遼東都司에서 이사경 등을 파견하여 압록강을 건너와 방을 붙여 이르기를, “호부에서 성지를 받들었는데, ‘鐵嶺迤北迤東迤西元屬開原 所管軍民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철령의 북쪽·동쪽·서쪽은 원래 개원에 속하니, 관할하는 군민 가운데 한인·여진·달달·고려인은 그대로 요동에 속하게 하라.’는 것이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러한 논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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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3 高麗史(1451)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帝豫設本衛鎭撫等官 皆至遼東 自遼東至鐵嶺 置七十站 站置百戶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가 지휘 2인을 보내 병사 천여 명을 데리고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를 설치하려 합니다. 황제가 먼저 본 위의 진무 등의 관원을 설치하여 모두 요동에 이르렀습니다.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을 두고 참마다 100호를 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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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3  高麗史(1451)
1388.03 高麗史(1451)
▐ 1342년에 雙城摠管府와 開元路 사이에 있었던 소통 경로, 1370년에 東北面에서 출발해서 黃草嶺, 雪寒嶺, 鴨綠江 그리고 亏羅山城을 거쳐갔던 이성계의 정벌 경로 그리고 1388년에 요동도사가 보낸 지휘 2인이 鐵嶺衛를 설치하러 江界까지 온 경로는 모두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遼東에서 鐵嶺까지 설치하려던 70참도 이 경로를 따라 예정되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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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3 明實錄
置鐵嶺衛指揮使司先是元將拔金完哥率其部屬金千吉等來附至是遣指揮僉事李文高顒鎮撫社錫置衛於奉集縣以撫安其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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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3 明實錄
徙置三萬衛於開元先是詔指揮僉事劉顯等至鐵嶺立站招撫鴨綠江以東夷民會指揮僉事侯史家奴領步騎二千抵乾朵裡立衛以糧餉難繼奏請退師還至開元野人劉憐哈等集眾屯於溪塔子口邀擊官軍顯等督軍奮殺百餘人敗之撫安其餘眾遂置衛於開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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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3 高麗史(1451)
명나라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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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4 明史(1739)
禑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鐵嶺之地實其世守 乞仍舊便 철령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 왔으니 과거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高麗舊以鴨綠江爲界 今飾辭鐵嶺 詐僞昭然 고려가 예전에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으면서 이제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의 말로서 타일러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써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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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4 明史(1739)
▐ 왕고가 서쪽 경계에 대해서는 1055년에 요나라에 국서를 보내어 압록강이라고 주장한 기록이 있으나 동쪽 경계에 대해서는 주장한 기록이 없다. 명나라로서는 원나라의 경계를 잇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에 왕고가 생소한 주장을 하자 납득하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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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4 明史(1739)
고려에서 국서를 보내, 요동의 문 · 고 · 화 · 정 등의 주는 모두 고려의 옛 영토이므로 철령에 군영을 설치해서 지키겠다고 주청했다. 이원명은 “그 몇 주는 모두 원의 옛 판도에 들어 있어서 요동에 속해 있고,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한계로 하고 있으며 지금 이미 철령위를 설치했는데 다시 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다시 청함이 있자, 황제는 그 나라를 달래어 정해진 땅을 지켜 헷갈리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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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4 明實錄
壬戌時高麗王禑表言文高和定等州本為高麗舊壤鐵嶺之地實其世守乞仍以為統屬 上諭禮部尚書李原名曰數州之地如高麗所言似合隸之以理勢言之舊既為元所統今當屬於遼況今鐵嶺已置衛自屯兵馬守其民各有統屬高麗之言未足為信且高麗地壤舊以鴨綠江為界從古自為聲教然數被中國累朝征伐者為其自生釁端也今複以鐵嶺為辭是欲生釁矣遠邦小夷固宜不與之較但其詐偽之情不可不察禮部宜以朕所言咨其國王俾各安分毋生釁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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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4 高麗史(1451)
당초 우왕이 최영과 둘이서만 의논해 요동 공격을 결정지어놓고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날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과인이 遼陽을 공격하려고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해야 할 것이오.”라고 당부했다. ... 좌군과 우군을 합친 총 병력은 38,830명이었고, 사역하는 인원이 11,634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이 21,682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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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5 高麗史(1451)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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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5.13 高麗史
좌우도통사가 상언하기를, “以小事大 保國之道 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작은 것으로서 큰 것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존하는 방도이니, 우리나라는 삼한을 통합한 이래로 부지런히 사대하여 왔습니다. 伏惟 殿下特命班師 以答三韓之望 원컨대 전하께서 특별히 회군을 명하시어 삼한의 기대에 답하시옵소서.” 라고 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이 듣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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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高麗史(1451)
이성계가 마침내 암방사의 북쪽 고개로 올라가서 대라를 한 차례 불게 하자 모든 부대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자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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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高麗史(1451)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명(明)의 복색제도를 습용하고 몽고 복장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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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高麗史(1451)
원수들이 부대를 동원해 대궐을 지키면서 우왕더러 강화부로 갈 것을 요구했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대궐을 나와 채찍을 잡고 안장에 올라, “오늘은 벌써 날이 저물었다.” 고 말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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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6 高麗史(1451)
당시 명(明)에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정벌에 나서기 위해 황제가 친히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사흘 동안 재계를 하다가 회군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재계를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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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08 明史(1739)
고려의 천호 진경이 내항하며 말하기를, “올해 4월, 우(禑)가 요동을 침범하기 위하여 도군상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서경에 군대를 집결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성계는 진경으로 하여금 애주에 주둔하도록 했으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군대를 후퇴시키고 말았습니다. 왕이 노하여 성계의 아들을 죽이니, 성계는 군대를 돌려 왕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과 최영을 가두어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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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0 明史(1739)
우(禑)가 그의 아들 창(昌)에게 양위할 것을 청원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앞서 그 왕이 유인되었다고 들었다. 이것은 성계의 책략이 분명하니 잠시 기다리며 그들의 동정을 살피기로 하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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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393 明一統志(1461)
鐵嶺衞 在都司城北 二百四十里 철령위는 요동도사성 북쪽 240리에 있다. 古有鐵嶺城 在今衞治 東南五百里 接髙麗界 옛날에는 철령성이 지금 치소에서 동남쪽 500리에 있었고 고려와 접했다. 洪武二十一年 置衞於彼 二十六年 徙今治 即遼金時 嚚州故城也 1388년에 그곳에 위를 설치했다가 1393년에 요나라와 금나라 시기의 옛 은주 성인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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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393 盛京通志(1736)
銀州 今鐵嶺縣治 은주는 지금의 철령현에 치소가 있었다. 唐渤海大氏取越喜地改富州遼史地理志銀州富國軍太祖以銀治更名領延津新興永平三縣金史地理志皇統三年廢州省延冿永平二縣入新興徙新興治故富州隸咸平府元廢縣仍隷咸平許亢宗奉使行程録離興州五十里至銀州又四十里至咸州 明洪武二十一年 在今縣東南五百里 故鐵嶺城置衛 二十六年 徙冶於此 1388년에 지금의 현에서 동남쪽 500리 거리에 있던 옛 철령성에 위로 설치했다가 1393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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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393 明史(1739)
鐵嶺衛 洪武二十一年三月 以古鐵嶺城置 철령위는 1388년 3월에 철령성에 설치했다. 二十六年四月 遷於古嚚州之地 即今治也 1393년 4월에 옛 은주 땅으로 옮겼다. 西有遼河 南有泛河 又南有小清河 俱流入於遼河 又南有懿路城 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 又範河城在衛南 亦曰泛河城 正統四年置汎河千戶所於此 東南有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옛 철령성이다. 고려와 접했다. 洪武初置縣 尋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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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393 明史(1739)
▐ 鐵嶺衛는 1664년에 청나라가 鐵嶺縣으로 바꾸었다. 嚚州는 성경통지(1736)에 나오는 銀州다. 명일통지(1461)와 성경통지에는 옛 鐵嶺城이 鐵嶺縣에서 동남쪽 500리 거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반해 명사에는 奉集縣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奉集縣은 鐵嶺縣에서의 거리가 100리 정도 밖에 안된다. 게다가 고려와 경계를 접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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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393¦鐵嶺城
1388~1393¦鐵嶺城
❶ 1342년에 雙城摠管府와 開元路 사이에 있었던 소통 ❷ 1370년에 東北面에서 출발해서 黃草嶺, 雪寒嶺, 鴨綠江 그리고 亏羅山城을 거쳐갔던 이성계의 정벌 ❸ 1388년에 요동도사가 파견한 지휘 2인의 江界까지의 이동 그리고 ❹ 遼東에서 鐵嶺까지 설치하려던 70참이 모두 같은 경로에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鐵嶺城도 奉集이 아니라 이 경로에 있는 集安이 어울린다. 铁岭市에서 동남쪽으로 500리쯤 떨어져 있고 왕고와의 경계였던 鴨綠江 북안에 있다.
11583 SHARED
 
1388~1393¦鐵嶺城
일본의 역사학자 池内宏(いけうち ひろし 1878~1952)가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한다. 鐵嶺城이 集安에 있었을 거라는 발상은 혼자 연구하면서 생각해낸 것인데, 100여년전 일본 학자가 이미 연구해 놓은 결과라니, 정서를 배제하고 논리적인 추론만 한다면 국적과 상관없이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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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0.02.06 高麗史(1451)
밀직부사 王可仁을 遼陽으로 돌려보냈다. 왕가인은 海洋副千戶 王萬僧의 아들인데, 都司에서 공문을 보내어 보내달라고 하였으므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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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
1433
11571 SHARED
 
1823 海東繹史
한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봉천부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을 헤아려 보면 봉황성 근방에 이른다. 홍무 21년에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서 고려의 북계(北界) 지역을 떼어 여기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그 뒤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6년에 이르러서는 봉천부의 북쪽으로 철령위의 치소를 옮겼는데, 지금의 철령현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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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 與猶堂全書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와 거란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써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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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 與猶堂全書
▐ 역사적으로 요동은 어느 세력도 오래 점유하지 못하고 주인이 수시로 바뀌어 왔다. 왕고 또한 요동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지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처럼 그것이 화근이 되어 침공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수가 왕의 명령을 받아 정벌에 나섰다가 군사를 되돌려 왕을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그것과 별개의 문제다. ᐥ요동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다행일 수 있지만 이성계의 반란은 잘못된 것이다.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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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5 복기대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철령위 자리를 오늘날 함경도 원산만 일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공격에 나선 이성계는 함경도가 아니라 중국 요동으로 향했다. 이 모순을 발견하고 중국 지리 역사서를 확인한 결과 철령위의 위치를 랴오닝 성 번시 시 부근으로 새로 설정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국경선은 한반도 안쪽이 아닌 북으로는 멀리 선춘령이었고 서쪽으로는 중국 요동지역이었다는 것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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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5 복기대 비판 ①
2010.04.15 복기대 비판 ①
▐ 다툼이 생기게 된 지역과 그것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1388년 3월에 요동도사가 보낸 지휘 2인이 병사 천여 명을 데리고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였지만 같은 해 4월에 우왕이 공격하겠다고 밝힌 곳은 강계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이었다. 요동도사가 요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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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5 복기대 비판 ②
2010.04.15 복기대 비판 ②
▐ 명나라가 설치한 철령위는 철령에 있지 않을 수 있다. 1388년 2월에 명나라가 철령 이북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고 했을 때, 우왕이 표문을 올려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원래 왕고의 땅이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다툼의 대상이 된 지역은 영흥만이 분명하다.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강계에까지 이르렀으나 강한 반발에 부딪히자 집안에 머무르며 그곳에 임시로 철령위를 설치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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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 @鐵嶺
23004 SHARED
 
吉林農安縣
초기 개원로 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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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都指揮使司
1402~1424遼東都指揮使司
 
鐵嶺
鐵嶺
지리적 경계로 철령이 자주 언급되지만 철령 옆으로 추가령구조곡이 나 있기 때문에 이 구조곡의 좁고 긴 통로가 실질적인 지리 경계였을 듯하다. 임진강과 동해로 흘러가는 강의 분수령은 이 통로의 남쪽 평지에 있기 때문에 이 통로에는 고개가 없다. 역사 기록에 지리적 경계로 언급되는 철령을 이 좁고 긴 통로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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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嶺衛
11580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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