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은 신라의 반도 통일로 형성되었다. 이 반도 통일을 완성한 시점의 북방 경계는 임진강이었다. 이후 대동강까지 영역이 확장되었고 왕씨고려 시기에는 압록강까지 그리고 이씨조선 시기에는 두만강까지 영역이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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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8 三國史記(1145)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 마려 (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35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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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三國史記(1145) 온조왕 24년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백 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왕을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모여 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이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
35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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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8 마운령
함경남도(咸慶南道)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사동(寺洞) 만덕산(萬德山) 복흥사(福興寺) 배후의 운시산 꼭대기에 있던 진흥왕순수비가 있었다.
38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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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2 三國史記(1145) 의자왕 02년
8월 장군 윤충(尹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品釋)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3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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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4? 三國史記(1145) 열전 강수
강수는 중원경 사량부사람이었다.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였다. 그 가운데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왕 앞에서 한 번 보고는 설명하고 해석하였는데 머뭇거리거나 막힘이 없었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34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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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 한국통일 이후 신라의 영토확장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자, 신라는 694년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고 713년에 개성을 쌓았으며 735년에 당(唐)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통치를 허용받은 뒤, 748년에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이어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6개 성을 쌓고 782년에는 한산주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826년에는 우잠 태수로 하여금 패강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38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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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三國史記(1145)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거느리게 했다. 수약주(水若州)를 삭주(朔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거느리게 했다.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거느리게 했다.
38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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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고려사절요 태조 원년
왕이 뭇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 도읍인 평양이 황폐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번인(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침략하니 마땅히 백성을 평양에 옮겨 살게 하여서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드디어 황주(黃州 황해 황주)ㆍ봉주(鳳州 황해 봉산(鳳山))ㆍ해주(海州)ㆍ백주(白州 황해 배천(白川))ㆍ염주(鹽州 황해 연안(延安)) 여러 고을의 인호(人戶)를 나누어 평양에 살게 하여 대도호(大都護)로 만들고, 당제(堂弟) 식렴
3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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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 고려사절요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3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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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신증동국여지승람
본래는 고려의 송산현이었는데, 덕종 2년에 성을 쌓고 정주진(靜州鎭)이라 하고서 백성 1천 호(戶)를 옮겨서 채웠고, 문종 31년에 또 내지(內地)의 백성 백 호를 옮겼다.
3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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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신당서(新唐書)
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
등주(登州)에서 동북으로 바닷길을 가서, 남으로 해안에 연하여, 패강(浿江) 입구의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에 닿을 수 있다.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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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8 고려사절요
○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정주(靜州) 등 5개 성이 성은 크고 백성은 적으니 내륙 주ㆍ현의 백성 각 백 호씩을 옮겨 채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3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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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고려사절요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윤관ㆍ오연총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보냈다. 을유일에 윤관ㆍ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고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호왈 20만이라 하였다.
3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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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고려사절요
의주(宜州 함남 덕원(德原))ㆍ통태(通泰 함남 함주(咸州))ㆍ평융(平戎 함남 함주(咸州))의 3성을 쌓아 함주ㆍ영주ㆍ웅주ㆍ길주ㆍ복주ㆍ공험진과 함께 북계의 9성으로 삼고, 모두 남계의 백성을 옮겨 이곳을 채웠다.
3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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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고려사절요
가을 7월에 재신과 추신 및 대성(臺省)ㆍ제사(諸司)ㆍ지제고(知制誥)ㆍ시신ㆍ도병마판관 이상 문무 3품 이상을 선정전에 모아 9성을 돌려 주는 일을 의논하니, 모두 돌려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다. 왕은 선정전에 거둥하여 요불 등을 인견하고 9성을 돌려 줄 것을 윤허하였다.
3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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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고려사절요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 등이 삭방도(朔方道 강원도) 등주와 문주의 여러 성 사람과 꾀를 합하여 몽고병을 이끌고 빈 틈을 타서 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와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드디어 고성을 쳐서 집을 불사르고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하여, 마침내 화주 이북의 땅을 몽고에 붙였다. 몽고에서는 이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화주에 설치하여 조휘를 총관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로
3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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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10-03 고려사(1451)
을해 서북면병마사영의 기관 최탄·한신과 삼화현인 전 교위 이연령, 정원도호부 낭장 계문비, 연주인 현효철 등이 임연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용강현·함종현·삼화현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종현현령 최원을 살해하였고, 밤에 가도로 들어가서 분사어사 심원준과 감창사 박수혁, 경별초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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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10-28 고려사(1451)
최탄이 서경유수 및 용주·영주·철주·선주·자주 등 5개 주의 수령을 죽이니, 서북지역 여러 고을의 관리가 모두 반적에게 살해되었다. 최탄이 몽고 사신 탈타아에게 거짓말로 말하기를, “고려는 온 나라가 장차 깊은 섬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죽이고 원(元)에 들어가서 보고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주부사 김효거 등 22인을 붙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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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02-07 고려사(1451)
최탄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에게 금패를, 현효철·한신에게 은패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를 내려 〈서경을〉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동녕부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을 〈왕고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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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 고려사절요
이전에 왕이, 인우(仁雨)가 지체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 환조(桓祖 李子春)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병마 판관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환조에게 타일러 내응(內應)하도록 하였다. 환조는 명을 듣고 곧 군사들에게 하무를 입에 물리고 가서 인우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인우 등은 진군하여 쌍성총관부를 격파하였다.
3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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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만약 그 도 안에서 이주시킬 수 있는 민호(民戶)가 2천 2백 호가 못 된다면, 충청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의 도에서 자원하여 이주할 사람을 모집하되, 양민(良民)이라면 그곳의 토관직을 주어 포상하고, 향리(鄕吏)나 역리(驛吏)라면 영구히 그의 이역(吏役)을 해제하여 주며, 노비(奴婢)라면 영구히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여 주어야 합니다.
3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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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7 조선왕조실록 세종 19년
충청도가 금년에 흉년이 더욱 심하니, 만일 경상도·전라도에서 입거(入居)하는 향호(鄕戶) 2천여 인이 그 땅을 경유한다면, 지나는 각 고을에서 공급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우선 정지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들여 보내고, 오직 강원·충청 두 도의 향호와 역리(驛吏)는 종전대로 옮기되, 봄철 동안에 한하여 전부 들여 보내도록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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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 조선왕조실록 세종 20년
금년에 이미 입거(入居)한 향호(鄕戶)와 역리(驛吏)는 아울러 모두 3백 80여 호에 인구가 5천 3백 30여 명인데, 이제 만약 다시 각도에 원래 배정한 수효를 이사시켜 들어가게 하면, 그 인구가 역시 2, 3천 명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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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 조선왕조실록 세종 20년
지금부터 향원(鄕愿)·토호(土豪)로 혹은 전장(田莊)을 널리 점령하였거나, 혹은 민정(民丁)을 은닉하였거나, 혹은 공사(公私)의 비자(婢子)를 첩으로 삼아서 그 욕망을 마음대로 채우거나, 혹은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환자 쌀을 받아 내거나, 혹은 곡식을 풀어서 이자놀이를 하여서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이윤을 독차지하는 그런 무리를 찾아내어서, 죄상을 조사하여 밝혀 내고 보낸다면, 가는 자도 죄상을 자복하고 가는 것이므로 원망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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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 조선왕조실록 세종 21년
남방(南方)의 연해변(沿海邊) 각 고을 향호(鄕戶)로서 부요(富饒)한 자를 택하여 북방(北方)에 입거(入居)시키면, 남방 연해변의 각 고을도 역시 다 방어하여야 할 땅이온데, 동쪽을 떼어 서쪽을 깁는 것[破東補西]은 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금후(今後)로는 연해변 향호(鄕戶)를 입거(入居)시키지 마시와 변방을 충실하게 하옵소서.
3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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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 조선왕조실록 세종 21년
금후로 입거(入居)한 향호로서 만일 도망하는 자가 있으면, 소재(所在) 각 관(官)의 이정(里正)·이장(里長)으로 하여금 곧 수령에게 고하게 하고, 수령은 급히 체전(遞傳)을 발하여 관진(關津)이 있는 각 관(官)에 알리고, 또 사람을 보내어 잡되, 어기는 자는 율에 의하여 논죄하소서.
3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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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 조선왕조실록 세조 06년
“하삼도(下三道) 여러 고을의 인호(人戶)내에서 취재(取才)에 입격(入格)한 경군사(京軍士) 외에 제색 군사(諸色軍士) 및 양민(良民) 향호(鄕戶) 중에 부실(富實)한 자를 경상도(慶尙道)에서 2천 5백 호(戶), 전라도(全羅道)에서 1천 5백 호, 충청도(忠淸道)에서 5백 호를 뽑아 정하여 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강원도(江原道)의 한광(閑曠)한 땅에 옮겨 살게 하라.”
3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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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 조선왕조실록 성종 11년
“내가 듣건대, 그 도는 본래 토지가 척박(瘠薄)하여서 백성들의 사는 것이 희소(稀少)하므로, 조종조(祖宗朝)부터 부득이 백성을 옮겨 살게 하여서 부성(阜盛)하기를 바랐으나, 백성의 피폐함이 더욱 심하다고 하니, 지금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삼도(下三道)의 부유한 백성을 뽑아서 채우고자 하니, 아무아무 고을이 피폐하여 마땅히 몇 호를 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경(卿)이 친해 살펴서 아뢰라.”
3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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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
“평안도와 황해도 두 도는 나라의 서문(西門)인데, 조종조(祖宗朝)에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으나 사망하여 거의 없어졌으니, ... 하삼도(下三道)에 공사천(公私賤)을 숨기고 부리는 자가 매우 많으니, 이제 공사천을 혹시 2명 이상 여러 해 동안 부리는 자로 공신(功臣)·의친(議親)을 물론하고 3품 이하는 모두 들어가서 살게 하며, 또 삼류(三流)의 죄를 범한 자도 옮기면 몇 해 안에 2, 3천 호(戶)에 이를 것입니다.”
3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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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 조선왕조실록 성종 19년
“경상도(慶尙道)는 땅이 좁고 백성이 많아서 백성이 가진 논에 종자를 뿌리는 수량이 많아도 한 섬에 미치지 못하고 적게는 열 말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한 자, 한 치의 땅을 서로 빼앗기를 다투어 사람을 상해하는 자가 종종 있으니, 이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근래에 한재(旱災)로 인하여 아직 입거(入居)를 정지하였으나, 양계(兩界)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으니 미리 대비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입거하게 하는 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이미
3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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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 조선왕조실록 성종 22년
“조산(造山)·경흥(慶興) 등지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본래 적은데다 요즈음 적변(賊變) 때문에 활을 가진 자가 모두 죽었으므로, 쇠잔하고 피폐하기가 더욱 심합니다. 남도(南道)의 백성을 옮기도록 하여 채우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3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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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0-01 선조수정실록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맨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를 처벌하게 하니, 회령의 유생 신세준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의 목을 베었으며,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고 반민들은 주벌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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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06-14
「노토는 이런 환란이 있을까 두려워 평소부터 깊은 산에 피할 계획을 하였으므로 그 자신은 겨우 환란을 면했으나 노토에 소속된 부락 7개처가 남김없이 분탕되어 죽은 사람의 수가 거의 1만여 명에 이른다. 」
2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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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10-27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함경 감사 장만(張晩)과 북병사(北兵使) 유형(柳珩) 등이 이달 8일 이후 각자 치계한 사연을 보니, 모두가 수하(水下)의 번호(藩胡)가 철수해 간 상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 육진(六鎭)의 백성은 본디 번호와 서로 의지하여 생활했는데 번호가 이미 철거했으니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
2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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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02-08
근래 들으니 ‘노추가 전일에 하세국(河世國) 등을 풀어 보낸 일과 사군(四郡) 고지(故地)의 오랑캐 가호를 철수시킨 일들을 자못 덕을 끼쳤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사례하지 않는 것을 매우 괴이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2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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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 조선왕조실록 숙종 38년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2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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