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종족 > 0926 여진이 된 부여·예·맥·옥저

고려는 맥인의 나라로 시작해서 예, 옥저 그리고 부여까지 흡수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나서는 이들 지역이 모두 발해의 영역이 되었다. 발해가 망했을 때 이들 맥, 예, 옥저 그리고 부여는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왕씨고려에서 여진으로 불렀다.
 
발해 안의 부여·예·맥·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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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삼국사기(1145)
國夲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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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삼국사기(1145)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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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구당서(945)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車一千八十乘,牛三千三百頭,馬二千九百匹,駝六十頭,將入內地,萊、營二州般次發遣,量配于江、淮以南及山南、並、涼以西諸州空閒處安置。고려의 2만 8천호와 수레 1천 80승, 소 3천 3백두, 말 2천 9백필, 낙타 60두를 내지로 끌고 왔다. 내주, 영주 2주 백성을 보내어 강회 이남과 산남에 병주, 양주의 서쪽 빈터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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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구당서(945)
高麗國舊分爲五部有城百七十六戶六十九萬七千 고려국은 지난날에 5부로 나뉘어져 176성 69만 7천호가 있었다. 乃分其地置都督府九州四十二縣一百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하고 또 안동도호부를 두어 총관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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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삼국사기(1145)
英公以王寳臧·王子福男·德男·大臣等二十餘萬口迴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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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삼국사기(1145)
평양 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의 적의·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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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발해의 행정구역
발해는 부여, 예맥, 옥저 그리고 고려의 옛 땅을 각각 부여부, 용원부(책성부), 남해부 그리고 압록부로 편제하였다. 왕고는 발해가 망하기 전에 세워졌으니 부여, 예맥, 옥저 그리고 고려의 옛 땅은 일단 왕고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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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신당서(1060)
국토는 5경·15부·62주다. 숙신(肅愼)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룡(龍)·호(湖)·발(渤)의 3주를 통치한다. 그 남부로 중경(中京)을 삼으니 현덕부(顯德府)이며 노(盧)·현(顯)·철(鐵)·탕(湯)·영(榮)·흥(興)의 6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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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신당서(1060)
●예맥(예貃)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慶)·염(鹽)·목(穆)·하(賀)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沃)·청(晴)·초(椒)의 3주를 통치한다. ※예맥과 옥저는 바뀐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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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신당서(1060)
●고려(高麗)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鴨淥府)이며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통치한다. 장령부(長嶺府)는 하(瑕)·하(河)의 2주를 통치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맥고려다. 낙랑고려는 발해가 차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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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신당서(1060)
●부여(扶餘)의 옛 땅에 둔 부여부(扶餘府)에는 늘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는데 부(扶)·선(仙)의 2주를 통치한다. 막힐부(鄚頡府)는 막(鄚)·고(高)의 2주를 통치한다. 읍루(挹婁)의 옛 땅에 둔 정리부(定理府)는 정(定)·심(潘)의 2주를 통치한다. 안변부(安邊府)는 안(安)·(瓊)의 2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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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신당서(1060)
솔빈(率賓)의 옛 땅에 둔 솔빈부(率賓府)는 화(華)·익(益)·건(建)의 3주를 통치한다. 불열(拂涅)의 옛 땅에 둔 동평부(東平府)는 이(伊)·(蒙)·(沱)·흑(黑)·비(比) 5주를 통치한다. 철리(鐵利)의 옛 땅에 둔 철리부(鐵利府)는 광(廣)·汾·蒲·해(海)·의(義)·귀(歸)의 6주를 통치한다. 월희(越喜)의 옛 땅에 둔 회원부(懷遠府)는 달(達)·월(越)·회(懷)·기(紀)·부(富)·미(美)·복(福)·사(邪)·지(芝)의 9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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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6 신당서(1060)
안원부(安遠府)는 영(寧)·郿·모(慕)·상(常)의 4주를 통치한다. 또 영(郢)·고(錮)·속(涑)의 3주를 독진주(獨秦州)로 삼았다. 속주(涑州)는 그곳이 속말강(涑沫江)과 가까운데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인 듯하다. 용원(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길이고 남해(南海)는 신라길이다. 압단(鴨湪)은 조공길이고 장령(長嶺)은 영주(營州)길이며 ●부여(扶餘)는 거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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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5-05 고려사(1451)
왕이 시일을 끌며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자 한국화가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며 설득했다. 왕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서쪽에서 만나겠다고 약속하자 한국화가 그제서야 돌아갔다. 앞서 거란이 여진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거쳐 갔는데 이 때문에 여진은 우리가 거란을 끌어다가 분란을 일으킨 것으로 여기고 송나라에 말을 바치러 가서, 고려가 거란과 합세해 자기 백성들을 납치해 갔다고 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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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1 고려사(1451)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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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 요나라의 왕고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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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 요사(1343)
왕치(성종)가 박랑유를 파견하여 표를 올려 죄를 자인하므로 조칙을 내려 여진국 압록강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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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05 고려사(1451)
서북계의 여진에서 거란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하려 계획한다고 알려 왔으나,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들이 우리를 속인 것으로 여기고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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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08 고려사(1451)
이 달에 여진이 거란의 군대가 침략하였음을 다시 알려오자, 비로소 일의 위급함을 알고 각 도에 병마제정사를 나누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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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10 고려사절요(1452)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의 안북부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에 의해서 점유되었는데 광종께서 그 곳을 취하여 가주·송성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서희가 한 말이다. 거란의 동경은 지금의 요양인데 요하의 동쪽에 있다. 안북부는 청천강을 건너기 전에 있었고 가주와 송성은 청천강 건너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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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 고려사(1451)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게 하고 장흥(長興)·귀화(歸化) 두 진과 곽주(郭州)·구주(龜州)에 성을 쌓게 하였다. ※두 진과 두 성은 모두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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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眞
1017 고려사(1451)  
 
女眞靺鞨
1023-04 고려사(1451)  
 
扶餘/貊/渤海
발해가 망한 이후 요나라에 대항해서 부여, 貊 그리고 발해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모두 일어났다. 왕고가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민족통일을 했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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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女眞
왕씨고려 초기   0948-09 고려사(1451)   1005 고려사(1451)   1010-05 고려사(1451)   1010-05 고려사(1451)   1011-05 고려사(1451)   1011-08 고려사(1451)   1012-02 고려사(1451)   1012-02 고려사(1451)   1012-02 고려사(1451)   1012-05 고려사(1451)   1012-10 고려사(1451)   1014-02 고려사(1451)   1015-03 고려사(1451)   1017 고려사(1451)   1018-01 고려사(1451)   1018-04 고려사(1451)   1020-05 고려사(1451)   1021-07 고려사(1451)   1021-09 고려사(1451)   1022-01 고려사(1451)   1028-12 고려사(1451)   1030-05 고려사(1451)   1031-03 고려사(1451)   1033-10 고려사(1451)   1073-05 고려사(1451)   1073-07 고려사(1451)   東蕃   黑水   黑水靺鞨  
 
西女眞
0926 요사(1343)   0981 송사(1345)   0984 고려사(1451)   0985 고려사(1451)   0991 고려사(1451)   0993 고려사절요(1452)   0993 요사(1343)   0993-05 고려사(1451)   0993-08 고려사(1451)   0994 고려사(1451)   1013-05 고려사(1451)   1017 고려사(1451)   1017-07 고려사(1451)   1018 고려사(1451)   1018-01 고려사(1451)   1018-04 고려사(1451)   1018-10 고려사(1451)   1033-10 고려사(1451)   1081-08 고려사(1451)  
 
靺鞨
0936 고려사(1451)   1023-09 고려사(1451)   1117-03 고려사(1451)  
 
¦여진이 된 부여/맥/예/옥저
고려에 통합되었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왕씨고려의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자리에 여진이 나타나는데 東, 西, 흑수, 말갈 등과 조합하여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크게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과 마운령 북쪽의 동여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그곳에 살던 예전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어떻게 된 것일까? 고려가 망할 때 고려인 2만 8천호 또는 20만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이 인구는 주로 평양 주변의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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